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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순이'를 아시나요?_-페이지터너' 이야기. 나도 페이지터너를 할 뻔한 경험이 있다. 이미 SBS 뉴스 사이트에 취재파일로도 썼지만, 이번호 클럽 발코니 매거진에는 내 경험담까지 곁들여 다시 썼다.
‘페이지터너’라고 들어보셨는지? 음악회에서 악보 넘겨주는 사람을 말한다. 음악회는 암보로 연주하는 경우도 있지만(대부분의 독주곡이나 협주곡은 암보로 연주한다), 실내악이나 반주는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악기 중에서도 특히 피아노 악보는 음표가 많고 복잡해서 연주자가 악보를 직접 넘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옆에 페이지터너가 앉게 된다. (‘페이지터너’에는 다른 뜻도 있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페이지터너 대신 ‘넘순이’, ‘넘돌이’라는 별명으로도 많이 불리는데, 한국에선 ‘넘순이’, 즉 여성 페이지터너가 많은 편이다. 유료로 페이지터너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고, 연주자와 친분이 있는
후배나 제자가 하는 경우도 있다. 악보를 읽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음악 전공자가 하는 경우가 많다. 음악적 지식은 기본이고, 공연 내내 한 음이라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갖춰야 하며, 피아니스트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페이지터너는 연주자의 옆에 조용히 앉아있다가 적당한 시점에 일어나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왼손으로 악보를 넘겨주고 다시 앉는다. 악보를 넘기는 시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어떤 연주자는 조금 일찍
넘겨주기를 원하고, 어떤 연주자는 딱 맞춰서 넘겨주길 원한다. 어떤
사람은 미리 페이지터너가 일어나서 악보를 넘길 준비를 하길 원하고 어떤 사람은 미리 일어나는 게 신경에 쓰인다고 싫어한다. 이렇게 연주자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페이지터너는 이를 잘 파악해서
제 때 넘겨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음악회 내내 자리를 지키는데도 관객들은 페이지터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훌륭한
페이지터너가 되기 위한 조건은 ‘존재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이지터너는 어디까지나 연주자를 도와서 더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다. 페이지터너가 드러나면 안 된다. 관객뿐 아니라 연주자까지도 페이지터너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수록 좋은 페이지터너다.
페이지터너는 장신구 없는 수수한 복장을 하는 게 기본인데
보통은 무난한 검정색 정장을 입는다. 페이지터너는 또 연주자와 함께 무대 입장과 퇴장을 하거나, 객석의 박수에 답례할 수도 없다. 연주자가 먼저 무대에 나가 인사한
뒤에 조용히 악보를 갖고 따라나가고, 연주가 끝난 후에도 역시 연주자가 인사를 마친 뒤에 악보를 챙겨서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따라 들어가야 한다. 커튼콜이 거듭되더라도 일단 퇴장한 페이지터너가 다시 무대에
나올 수 없는 건 물론이다.
나는 SBS 8시뉴스에 페이지터너 기사를 쓰기 위해 지난달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중 하루를 골라 취재했다. 공연을 보면서 페이지터너에 주의를 기울이니 예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이 날 페이지터너는 피아니스트 김영호 씨의 제자 선다운 씨였다. 2009년부터 페이지터너를 했다고 한다. 악보를 넘기느라 잠깐씩
일어나는 것 외에는 공연 내내 미동도 않고 피아노 옆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힘들겠다 싶었다.
이 날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져 김영호 씨를 비롯한 연주자들이 일어나서 인사를 할 때,
페이지터너는 살짝 일어나 피아노 뒤로 숨었다. 페이지터너는 객석의 박수에 답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피아노 뒤에 서서 소리 안 나게 손뼉을 치는 페이지터너의 모습을 보니 살짝 뭉클해졌다. 이 모습도 객석에서는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무대 옆쪽에서
찍은 화면을 보니 확실히 보였다.
페이지터너는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지만, 그 역할은 막중하다. 페이지터너가 연주자가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잘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 연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페이지터너 때문에 공연을 망치는 경우도 가끔 있다. 피아니스트 김영호
씨는 해외 공연에서 페이지터너였던 할머니가 너무 긴장해서 내내 부들부들 떨더니 악보를 넘기다가 그만 떨어뜨려서 처음부터 연주를 다시 시작했던 적도
있다는 경험담을 들려줬다. ‘페이지터너가 연주자와 호흡이 맞지 않아 연주하던 피아니스트가 중간에 페이지터너
손목을 잡고 저지하는 광경을 본 적도 있다’는 분도 트위터에서 만났다.
이렇게 페이지터너가 연주에 영향을 많이 주기 때문에, 민감한 연주자들은 페이지터너 없이
직접 악보를 넘기면서 연주하기도 한다. 연주 내내 옆에 누군가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연주자가 직접 악보를 넘기면, 느린
부분은 좀 낫지만 빠른 부분에서는 연주하랴 페이지 넘기랴 굉장히 바쁘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 내한공연에서, 반주를 맡은 피아니스트가 직접 악보 넘기는 게 신경이 쓰여 연주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
요즘은 전자 악보를 쓰는 연주자들도 점차 늘고 있다. 전자 악보는 휴대가 용이하기도 하고, 손이나 발 터치로 간편하게 악보를 넘길 수 있어서 페이지터너가 없어도 된다는 게 장점이다. 피아니스트 안젤라 휴이트가 얼마 전 내한공연에서 전자 악보를 들고 나왔는데,
페달 옆에 연결장치를 발로 밟아서 악보를 넘겼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종종 아이패드 전자악보를 사용하는데, 가벼운 손 터치만으로
악보를 넘길 수 있어서 편리하다고 했다. 손열음의 전자악보는 오른쪽을 터치하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왼쪽을 터치하면 앞 장으로 되돌아가게 돼 있었다. 터치에 민감해서
가끔은 두 장이 한꺼번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되넘기는 것도 어렵지 않아서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자악보는 전원이 꺼지거나 오작동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서 아직 전반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하고 있다. 종이악보가 당분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종이악보가
쓰이는 한 페이지터너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음악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연주하지 않는 연주자’, ‘숨은 연주자’로 무대를 지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음악 전공자는 아니지만 페이지터너를 할 뻔한 적이 있다. 5년 전 연수
기회를 얻어 영국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이다. 당시 나는 20여
년 만에 피아노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나를 가르치던 피아노 선생님이 자신과 다른 학생들이
출연하는 살롱 음악회에서 페이지터너를 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원래 다른 학생이 하기로 했는데 일이 생겼다면서. 이 음악회는 며칠 후 대학 교내 뮤직센터 앙상블 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정확한 곡명은 생각나지 않지만 내가 악보를 넘겨줘야 할 곡은 모차르트의 실내악곡 중 하나였다. 선생님은
이 곡에 반복되는 부분이 있으니 악보를 넘기다가 다시 뒷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만 신경 쓰면 된다고 했다. 아주
복잡한 곡은 아니었고 프로페셔널 연주회도 아니라서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는데 연주회 날 아침이 되니까 덜컥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건데 혹시 실수라도 하면? 두 장을 한꺼번에 넘기면
어떻게 하지? 타이밍을 잘 맞출 수 있을까? 나 때문에 연주를
망치면 어떻게 하나?
나는 당시 ‘페이지터너의
수칙’ 같은 건 잘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평소 안 입던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연주회장에 일찍 가서 열심히 악보를 들여다보고 넘기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도착해서는 원래의 페이지터너가 다시 할 수 있게 됐다며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며칠 전 전화했는데 내가 연락이 되지 않아 알리지 못했다면서 미안하다 했다.
순간 맥이 풀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에서 벗어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컸다.
나의 ‘페이지터너 데뷔’는 이렇게 무위에 그쳤지만, 당시 페이지터너의 역할을 연습해 본 경험이 알게 모르게 페이지터너를 취재하게 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페이지터너를 해봤으면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랬다면
이번에 페이지터너 기사를 좀 더 실감나게 잘 쓸 수 있었을까.
음악회가 열리기 위해서는 음지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들의 목표는 연주자들이 무대 위에서 빛나게 하는 것, 즉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페이지터너는 이 중에서도 특이한 존재다. 무대 뒤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일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이니까. 앞으로
음악회 보러 가면 한 번쯤은 페이지터너에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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