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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블로그 글 중에서 지난해 가을 서울시향 월간지 SPO에 기고했던 'My Beloved Classic-의상을 입어라!'를 옮겨왔다. 'My Beloved Classic'은 매달 바뀌는 글쓴이의 사진이 꽤 크게 들어가는 꼭지였기 때문에, 나는 이 원고를 쓴 덕분에 번듯한 프로필 사진들을 갖게 되었다. 아래 사진을 비롯해, 포토그래퍼 손치홍 씨가 촬영한 사진들은 모두 목동 SBS 사옥 근처에서 찍은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즐겨 들었던 매우 낡은 LP 음반 한 장이 나의 음악 취향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Ten Tenors & Ten Arias’ 음반이었다. 카루소, 비욜링, 디 스테파노, 탈리아비니 등 전설적인 10명의 테너가 각각 10곡의 유명 아리아를 부른 음반.
맨 처음 나를 매혹시킨 건 조심스럽게 턴테이블 위에 음반을 올려놓고, 바늘을 제 트랙에 위치시키고, 음반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음악이 울려 퍼지는 바로 그 과정이었다. 어느새 퇴근한 아버지가 마루 소파에 앉아 ‘텐 테너 좀 틀어봐라!’ 하면 음반을 가져와서 트는 ‘의식’은 나의 몫이 돼버렸다. 나는 음반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재빨리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함께 음악을 듣곤 했다.
카루소가 부른 오페라 ‘팔리아치’ 중의 ‘의상을 입어라!’와 탈리아비니가 부른 ‘사랑의 묘약’ 중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아버지가 이 음반에서 가장 좋아한 노래였다. 나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좋았지만, ‘의상을 입어라’는 이상했다. 전혀 감미롭지 않았고, 중간에 나오는 웃음 소리가 어색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자기는 굉장히 슬프고 괴로운데도 남들을 웃겨야 하는 광대의 노래’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상한 웃음 소리가 울음 소리 같기도 했다.
이 아리아에 정말 내 마음이 움직인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였다. 아버지와 함께 음악을 듣지 않게 된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하던 일이 어려워지면서 시간만 나면 혼자 등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는 일이 많아졌다. 집안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혔다. 그저 우울했다. 사춘기였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 아리아를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시험 공부를 하던 중이었는데, 전곡 감상 프로그램에서 오페라 ‘팔리아치’가 나왔다. 오페라 아리아는 여러 차례 들어봤지만, 오페라를 전곡으로 감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그 날 방송된 ‘팔리아치’는 ‘내 인생 첫 오페라’라고 할 수 있겠다. 마리오 델 모나코가 주역을 맡았던 것 같다.
진행자는 ‘팔리아치’가 ‘오페라 베리즈모’의 대표작이며, 작곡가 레온카발로는 실제로 있었던 살인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직접 오페라의 대본을 썼다고 설명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실감을 더했다. 방송은 중간중간 줄거리 해설을 곁들여가며 이어졌다. 깊은 밤, 나직한 목소리의 해설을 곁들인 오페라에 나는 푹 빠져들었다. 어느새 시험 공부는 뒷전이 됐다.
“유랑 극단의 희극배우인 카니오는 아내 넷다의 불륜 사실을 알고 격분한 가운데서도 공연 시간이 다 되어,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올라야 합니다. 이 때의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는 노래가 바로 ‘의상을 입어라!’ 입니다. 아내의 배신에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서도, 광대 분장을 하고 공연에 들어가 관객을 웃겨야 하는 주인공의 심정이 절절히 나타납니다…….“
나는 ‘의상을 입어라!’를 들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아리아만 따로 떼어 들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제야 왜 이 사나이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슬픔이, 절망이, 마치 내 것인 양 느껴졌다. 그의 처절한 절규가 내 가슴을 두드려댔다.
“카니오는 역시 배우인 아내 넷다와 함께 무대에 오르지만, 점점 극중 장면과 현실을 혼동하게 됩니다. 카니오는 넷다에게 애인의 이름을 대라고 종용하고, 카니오의 광기에 위협을 느낀 넷다가 애인 실비오를 부르자, 실비오는 무대 위로 뛰어오릅니다. 결국 카니오는 아내와 그 연인, 두 사람을 다 찔러 죽입니다. 놀란 관객들 앞에서 카니오는 망연자실, 연극은 끝났습니다......"
아아. 연극은 끝났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망연자실한 카니오가 내 눈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끔찍한 살인자였지만, 그가 한없이 가엾었다. 이렇게 불행한 사람이, 이렇게 외로운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혼자 실컷 울었다. 눈물이 마를 때쯤, 마음이 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듣지 않았던 ‘텐 테너’ 음반을 꺼내 다시 듣기 시작했다. ‘의상을 입어라!’는 즐겁기는커녕 절망을 온몸으로 토로하는 곡인데도, 우울하고 짜증이 솟구칠 때 들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돌이켜 보니, 너무나 불행하고 고독한 사나이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슬픔에 함께 젖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이 말갛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
‘팔리아치’ 전곡 음반을 사고, ‘팔리아치’를 실제로 오페라 극장에서 본 것은 어른이 된 후의 일이었다. 음악을 듣고 상상만 했던 무대를 눈 앞에서 보면서, 인생 역시 한 편의 연극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연극이라면, 우리 모두가 결국 변덕스런 인생에 휘둘리는 광대 같은 존재 아닐까. 비극으로 치달을지라도, 당장은 ‘의상을 입고’ 희극을 연기해야 하는 광대 말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의상을 입어라!’를 듣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딸 은우와 함께 들은 적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은우는 내가 이 아리아를 처음 들었을 즈음과 비슷한 나이인 것 같다. 은우가 처음 이 노래를 듣고 보인 반응 역시 ‘웃음 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들었던 설명을 은우에게도 해주었지만, 별로 관심을 갖는 눈치는 아니다.
은우는 클래식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름의 취향이 있고 생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은우도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길 바란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의상을 입어라!’가 은우의 마음에 절실히 와 닿는 순간이 오게 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만약 은우가 이 노래를 정말 좋아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인생의 쓴맛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 인간에 대한 연민을 좀 더 느끼게 된 후일 것이다. (1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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