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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은 달콤하다. 요즘 한창 바쁜 프로젝트 중이라 휴일 없이 일하던 남편도 어제는 모처럼 쉬었다. 아이들도 학교 안 가는 토요일. 어제는 세 끼를 다 집에서 해 먹었다. 날마다 세 끼 해 먹어야 한다면 지겨울 수 있겠지만, 나야 평일에는 아침 빼고는 대부분 밖에서 먹으니까 이렇게 가끔 휴일에 세 끼 다 집에서 해 먹는 게 색다른 재미다. 본격적으로 밥 해 먹기 시작한 게 2007년 여름 영국 연수 가면서부터였으니, 아직 지겨울 때는 안 된 게지. 

늦잠 자고 일어나 전날 먹던 밥과 미역국으로 아침 차려 먹고, 점심 때는 남편이 나서서 무 갈고 파 썰어 장터에서 사온 면과 장국소스로 메밀국수 해 먹고, 저녁 때는 내가 소고기 무국 새로 끓여 마감. 저녁 먹으면서 '맛있어?' 하고 물었더니(사실 물어본다기보다는 '맛있다'는 다짐을 받고 싶은 심리다), 남편은 대답 없고, 둘째는 '응!' 하고, 첫째는 '아니!' 하고 고개를 저으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영국 연수를 기점으로 이른바 '살림'이란 것에 좀 자신이 생긴 건 사실이다. 당시에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고, 외식은 턱없이 비싸고 맛도 없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이지만, 하다 보니 이것도 은근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가족들 데리고 영국에 1년간 공부하러 갔다 온다고 할 때,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평소에 살림하고는 담을 쌓고 지낸 내가 어떻게 1년간 부모님 도움 없이 지낼 수 있을까, 밥은 제대로 챙겨 먹을까,뭐 이런 걱정 말이다.

나도 걱정했지만, '닥치면 한다'는 게 내 신조. 정말 살림도 닥쳐서 하다 보니 어찌어찌 되었다. 내가 이런 종류의 일도 잘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지기도 했고. 내가 만든 요리를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줄 때 느끼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 한국인 유학생이니, 외국인 친구니, 집에 손님 불러서 밥 먹이는 일도 즐기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업무 복귀한 뒤에는 영국에 있을 때만큼은 살림에 신경을 못 쓰고 있다. 하지만 주말에는 주로 집안 일을 하면서 보낸다. 영국 연수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밀린 빨래 하고, 빨래 걷어 개어놓고, 청소하고, 밥 하고, 설거지 하고, 냉장고 정리 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아이들이 크니 빨래도 많아지고, 청소도 더 자주 해야 한다. 예전엔 안 했던 집안 일이 늘었다.  

어제는 둘째가 거들어줘서 무척이나 흐뭇했다. 저녁 해 먹고 나서 남편에게 설거지 하라고 했더니, 나중에 하겠다며 꼼짝도 않는다. 그랬더니 둘째가 '내가 할래!' 하고 나섰다. 초등학교 1학년. 키가 작으니 개수대 앞에 의자를 갖다놓고 올라가서 하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옆에서 지켜보니, 느리긴 해도 제법 야무지게 닦는다. 달그락 달그락, 손이 느리고 서툴러 설거지에 1시간 가까이 걸렸다. 둘째는 물이 튀어 옷이 온통 젖은 채로 손을 닦으며 의기양양하게 부엌을 나왔다. 


내친 김에 둘째의 살림 거들기는 계속됐다. 걷어놓은 빨래 개기도 가르쳐 줬더니,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열심히 수건을 개서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그러더니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텔레비전 보고 있는 아빠한테, '아빠는 꼭 버려진 소파에 누워 있는 거지 같아!' 하고 한 마디 한다. 딸에게는 '아빠한테 거지라니, 너무 심하잖아!' 했지만, 표현이 좀 심해서 그렇지, 남편한테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던 내 마음을 딸이 어떻게 알았을까.^^ 

살림을 가끔 해서 그런지, 이렇게 집안 일을 끝내놓고 나면 성취감이 있다. 밥 해 놓고, 국 끓여놓고, 냉장고에 차곡차곡 반찬통 쌓아놓고 나니 뿌듯하다. 회사 일이야 항상 해오던 거고, 상대적으로 생소한 집안 일도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으니 내 자신이 기특하고 대견하다고 할까. 전에는 내가 이런 일을 잘 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 이렇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살림의 달인인 다른 사람들이 보면 웃을 일이겠지만.  

일요일인 오늘은 근무다. 출근할 때 보니 둘째만 깼는데, 회사 도착할 때쯤 되어 둘째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우리 오늘 뭐 먹어?' 배가 고픈가 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빠 아직 안 일어났어?"

"응. 언니도 아직 자."

"그래? 아빠 깨워서 밥 차려달라고 해. 알았지?"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새삼 살림하는 내가 대견하고, 살림 거들어주는 둘째도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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