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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박혜상이 부른 한국 가곡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곡을 처음 접했을 때, 작곡가가 궁금했습니다. 박혜상은 이 곡을 자신의 도이치그라모폰 데뷔 앨범에 실었습니다. 도이치그라모폰 앨범 120여 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가곡이 실린 것이지요. 박혜상은 대학 시절 출전했던 콩쿠르에서 이 곡의 작곡가 김주원과 나란히 수상했던 인연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인터뷰를 위해 김주원 작곡가를 만났습니다.

작곡가 김주원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2012년 제4회 세일한국가곡콩쿠르 작곡 부문 1위 곡입니다. 김주원 작곡가는 이 콩쿠르 참가 당시 20대 후반으로, 가곡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요즘은 조금 바뀌었습니다만, 당시에는 이 콩쿠르 작곡 부문 예선을 통과하면 본선 지정 시가 나왔다고 해요. 김주원 작곡가는 본선 지정 시들 중에 서정주 시인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선택했습니다. 이별을 담담하게 노래한 시의 느낌이 좋았다고 합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본선 작품 제출까지는 서너 달 정도 시간이 주어졌다고 하는데요, 김주원 작곡가는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고, 시집과 연구 논문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공들여 곡을 써 나갔습니다. 시어의 이미지화, 반복을 통해 시의 섬세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작곡가 김주원 제공)

"시에서 처음부터 '섭섭하게' 이러잖아요. 이유도 없이 그냥. 이런 느낌을 표현하려고 고민했어요.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 보통 음이 많이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섭섭하게'라는 그 말을 음악적인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어요. '섭-섭-하-게'를 같은 음으로 처리해서 이미지화하려고 했어요.
또 '섭섭하게'를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시가 짧으면 곡을 쓰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는데, 반복을 통해 음악적으로 처리했습니다.
시 뒤쪽으로 가면 '바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아' 발음이니까 고음에 붙이기 참 좋거든요. 그래서 '바람'은 고음으로 처리하고. 그런 식으로 풀어봤습니다."

이 시에서 '연꽃 만나러'와 '연꽃 만나고'는 혼동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나고'라고 불러야 할 대목에서 '만나러'로 부르는 실수도 있고 제목을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로 적기도 합니다. 한 글자 차이밖에 안 나서 혼동하는 건데, 사실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만나러' 가는 것은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이고, 언제 만날지 사실 기약이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나고'는 이미 만난 거잖아요. 그러니까 확신이 있어요. 그래서 그 차이가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죠. 시에서는 '만나러'와 만나고'가 이어서 나오는데 앞의 '만나러'는 불확실함을 담고 있어서 조금 어두운 느낌으로 작곡했고, 뒤쪽에는 '만나고'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좀 밝게 표현했습니다."

콩쿠르 수상 이후에 이 곡의 초연은 테너 김재형이 했습니다. 또 테너 김우경이 부르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김우경 노래 2014년 공연 실황www.youtube.com/watch?v=mP_rABjrVy4 ). 뮤지컬 배우 임태경 역시 이 곡을 즐겨 불렀습니다. 남자 곡으로 썼지만, 소프라노 임선혜 등 여성 성악가들도 이 곡을 즐겨 부릅니다. 최근 임선혜는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이 곡을 불렀는데, 앙코르 무대에 깜짝 등장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반주를 맡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박혜상 역시 이 곡을 즐겨 부르다가, 도이치그라모폰 데뷔 앨범에도 실은 겁니다. 그야말로 작곡가 김주원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박혜상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8월 롯데콘서트홀 공연 실황 www.youtube.com/watch?v=5d7lnxPu_wQ).

"도이치그라모폰 앨범에 첫 한국어 노래라고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음반사에서 한국어 가사는 바로 해석이 어렵겠지만, 곡이 음악적으로도 괜찮겠다 해야 앨범에 실을 수 있는 거잖아요. 음반사와 잘 협의를 해준 박혜상 씨의 공이 크죠. 혜상 씨한테 너무 감사하고 있어요. 전 세계에서 음반이 발매됐으니, 이를 계기로 한국에도 이런 가곡이 있다는 게 좀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또 앨범에 보니까 한국어 시를 영어와 독일어로도 번역해서 실었더라고요. 음악뿐 아니라 한국의 시 문학을 알리는 계기도 될 것 같고요."

소프라노 박혜상(출처 도이치그라모폰 페이스북)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곡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릅니다. 소프라노 박혜상이 부르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는 풍부한 감정이 실렸습니다. '섭섭하게'를 담담하게 노래하기 시작하지만, 점차 고조되는 감정을 충분히 드러내 보다 극적으로 느껴집니다. 앨범에서는 빈심포니가 반주를 맡았습니다. 작곡가는 이번 앨범 녹음을 앞두고 박혜상의 음색에 맞도록 새롭게 오케스트라 편곡을 했습니다. 그는 편곡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박혜상 씨의 이 곡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 작업이 더욱 즐거웠다'고 했습니다.

"외국인(지휘자 베르트랑 드 빌리)이 지휘하고, 빈 심포니가 연주하고, 물론 노래는 박혜상 씨가 불렀지만, 연주된 걸 들으니 너무 깔끔하게 잘 해주셨고 해석도 독특하고 좋았어요. 외국인들이 생각하는 우리나라 음악의 정서는 어떻게 표현될까, 궁금했는데 나름의 방식으로 잘 표현했더라고요. '음악은 하나의 언어'라는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주원 작곡가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말고도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그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다음으로 애착을 갖는 곡은 윤동주 시에 곡을 붙인 '무서운 시간'입니다. 올해 '팬텀싱어3'에서 포송포송(존노, 고영열, 김바울, 정민성)이 불러 최고점을 받으면서 더 유명해진 곡이기도 하죠. 존노, 고영열, 김바울, 황건하로 구성된 '라비던스'도 콘서트에서 이 곡을 불렀습니다. (김주원 작곡가 유튜브의 원곡: 테너 김윤권 노래 '무서운 시간' www.youtube.com/watch?v=BLdAkbSi2-U).

그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인상 깊게 보고 윤동주 시인의 시를 알아보다가 이 시를 발견해 곡을 썼습니다. '무서운 시간'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고 윤동주 시인의 시 중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시대적 배경이나 화자의 심경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어서 이 시에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김주원 작곡가는 '무서운 시간'으로 2016년 음악저널콩쿠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곡은 또 그가 2017년에 윤동주의 삶을 소재로 쓴 첫 오페라 '너에게 간다'에서 윤동주의 아리아로 쓰였습니다. '팬텀싱어'에서 이 곡을 부른 정민성은 윤동주 역은 아니었지만 '너에게 간다' 오페라 초연 무대에 출연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월간 김주원 유튜브 채널 그는 2년 전부터는 '월간 김주원'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신곡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발표하고 있습니다(월간 김주원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c/lotuswind/featured. )매달 신곡을 쓰는 게 쉬는 일이 아닌데, 한국 가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합니다.

"한국 가곡은 우리 정서가 잘 드러날 수 있다는 게 매력이죠. 베토벤도 있고 슈베르트 가곡도 있고, 외국어로 된 가곡들 참 많은데, 전문 연주자가 아니고서는 가사가 무슨 뜻인지 듣고 알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한국어는 우리 말이니까 가사 전달이 바로 됩니다. 한국 음악만이 가진 정서가 한국어 가사와 만나서 좀 더 잘 전달될 수 있는 거죠."

'월간 김주원'을 보면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 '빈 집', 김용택이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광균의 '은수저' 등 다양한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와 '무서운 시간' 말고도 마음을 끄는 곡들이 많습니다. '무서운 시간'이 오페라 아리아로도 쓰였다고 했지만, 다른 가곡들 중에도 극적인 오페라 아리아처럼 느껴지는 곡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그는 내년에만 세 편의 오페라 초연을 예정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전에는 한국 가곡, 하면 '그리운 금강산'이나 '가고파' 같은 비교적 오래 전 작곡된 곡들만 떠올렸는데,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취재하고 작곡가 김주원을 만나면서, 요즘도 좋은 한국 가곡이 계속 나오고 있고, 세일한국가곡콩쿠르 같은 '등용문'이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작곡가가 쓴 한국 가곡이 좀 더 널리 알려지고, 즐겨 불리고, 전 세계 클래식 팬들에게도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SBS 뉴스 취재파일로 쓴 글입니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110718&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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