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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한국 가곡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섭섭하지만 아주 섭섭한 게 아니라 좀 섭섭한 듯만 하다'는 말,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으시죠? 그 뒤에는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가 이어집니다. 가사에서 한국어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이 노래가 클래식 음악 명가인 독일의 도이치그라모폰 앨범에 실렸습니다. 소프라노 박혜상의 도이치그라모폰 데뷔 앨범입니다. 한국어로 부른 한국 가곡이 앨범에 실린 것은 120여 년 도이치그라모폰 역사상 처음입니다.

소프라노 박혜상 도이치그라모폰 데뷔 앨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중심으로 전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박혜상은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하는 '라이징 스타'입니다. 코로나19로 음악계가 침체된 와중에도, 도이치 그라모폰은 박혜상과 전속계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에서 빈 심포니 반주로 박혜상의 첫 앨범 녹음을 진행했습니다. 최근 전 세계에 발매된 이 앨범에 박혜상이 평소 즐겨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들과 나란히, 한국어로 부른 한국 가곡 두 곡이 실렸습니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서정주 시. 김주원 곡)'와 '시편 23편(나운영 곡)'입니다. 데뷔 앨범에 꼭 한국 가곡을 넣겠다는 박혜상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결과입니다.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 한국인으로서 책임감, 한국의 작곡가와 새로운 문화를 알리고 싶은 것도 물론 있었고요,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제 자유로운 영혼(Free Spirit)을 전달하는 데에는 한국 곡 만한 것이 없었어요. 도이치그라모폰에서 사실 한국 가곡은 아무도 불러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곡이었겠지만, 제가 그 경계를 허물어보고 싶다는 도전이 생겨서 한국 가곡을 부르겠다고 했죠"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성경 구절에 곡을 붙였기에, 내용 자체는 외국인들에게도 아주 생소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한국 가곡이라면 '가고파'나 '그리운 금강산' 같은, 비교적 오래된 곡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곡은 2012년 제4회 세일가곡콩쿠르에서 처음 발표된, 요즘 가곡입니다. 김주원 작곡가는 당시 서정주 시에 곡을 붙인 이 작품으로 이 콩쿠르 작곡 부문 1위를 차지했습니다. 소프라노 박혜상은 성악 부문에 출전해 1위 없는 2위를 수상했습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김주원 작곡가 제공) 


박혜상은 이 콩쿠르에서, 함께 수상한 작곡가 김주원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곡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박혜상은 듣자마자 이 노래에 푹 빠졌다고 했습니다. 이후 많은 무대에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즐겨 불렀고, 자신의 도이치그라모폰 데뷔 앨범에도 싣게 된 것이죠. 김주원 작곡가는 이번 앨범 녹음을 위해 박혜상의 스타일과 해석에 맞춰 오케스트라 편곡을 새로 했다고 합니다.

*소프라노 박혜상이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피아노 반주로 이 곡을 부른 영상입니다. 꼭 들어보세요. 한옥 배경에 곡의 정취가 정말 잘 어울리는 영상입니다. www.youtube.com/watch?v=b-F6D-FrlGs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사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무대에서 종종 불리고 있습니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멜로디가 전주부터 듣는 이들을 사로잡는데요, 테너 김우경, 소프라노 임선혜, 뮤지컬 배우 임태경 등 수많은 유명 성악가와 뮤지컬 배우들이 이 곡을 즐겨 불렀습니다. 유튜브에서 검색해보시면 영상이 많습니다. 특히 임선혜는 최근 국제무대 데뷔 20주년 콘서트에서, 앙코르 무대에 '깜짝 출연'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반주로 이 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제 박혜상의 앨범을 통해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이 이 곡을 알게 될 테니, 앞으로는 외국 무대에서, 외국 성악가들이 이 곡을 부르는 날을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요. 방탄소년단의 한국어 노래를 외국 팬들도 따라 부르는 것처럼요.

박혜상의 앨범 속지에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의 한국어 가사와 영어·독일어 번역이 함께 실렸습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를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대목은 또 어떻고요. 한국어 시 전문과 영어 번역을 소개합니다. (서정주 시. 데이비드 맥캔 번역. 컬럼비아 대학 출판사 1989)

다음 취재파일에서는 이 곡을 쓴 김주원 작곡가를 만나보겠습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Like the Wind That Met With Lotus

Sadly, though not
terribly
just
a bit sadly

parting, though not
forever
parting 
as if to meet again

in another life

like a wind away
not toward
lotus blossoms

not the wind you met
a few days ago, but the wind
of a season or more
past


#SBS뉴스 취재파일로 쓴 글입니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095786&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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