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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제교류재단이 9개 언어로 전세계 160개국에 배포하는 잡지 <KOREANA> 봄 호에 실린 이자람 인터뷰. 이런 잡지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내가 외국인 독자를 상대로 글을 쓰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쉽지 않았다. 편집을 맡아준 이상현 씨에게 감사한다. 영문 원고도 곧 포스팅하려 한다. (외국어 원고는 내가 쓴 국문 원고를 전문가들이 번역한 것이다.)  

[Interview]

이자람: 우리 시대의 판소리 스타

수현(Kim Soo-hyun 金修賢) 공연 칼럼니스트


[
리드]

소리꾼 이자람(Lee Ja-ram, 36)은 국악계의 새 별이다. 오랜 동안 일부 세대에서만 향유되었던 판소리의 저변을 확대해 남녀노소 다양한 관객들을 판소리 공연장으로 불러모은 주인공이다. 판소리 작품으로는 드물게 전회 매진을 기록해온 그녀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공연 축제에서 환영 받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지난 1월 말, 2015 시드니페스티벌에서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을 판소리로 번안한 <억척가(Ukchuk-ga: Pansori Mother Courage)>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이자람을 만났다.

 

[발문]

저는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동시대적이며, 가장 동시대적인 것은 그 사회를 담고 있는 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소위 전통의 대중화와 세계화의 두드러진 예로 자주 언급되지만, 제 자신이 이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저 제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으려 했던 과정을 거쳐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던 것뿐입니다.”

 

[본문]

주검이 된 딸을 향해 억척어멈이 애끓는 울음을 토해낸다. 소리꾼 이자람의 애절한 소리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드라마씨어터를 가득 메운 관객들이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낸다. 이자람이 <억척가>에서 억척어멈을 비롯해 15인 역을 홀로 연기한 2시간 30분 남짓한 시간 내내, 객석에서는 환호와 박수 갈채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시드니페스티벌의 프로그램 디렉터 피오나 위닝은 판소리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호주의 공연 시장에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공연 이후 쏟아지는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과 평단에서 나온 기대 이상의 호평이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이자람 역시 이번 공연 분위기를 객석이 뜨겁게 타오르는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대본, 작창, 예술감독, 출연 등 이자람이 1 4역을 맡은 <억척가>는 판소리와 연극의 경계에 서 있는 이른바 창작 판소리. 소리꾼 한 사람이 노래와 대사, 연기, 내러티브까지 도맡아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1인 오페라라는 전통 판소리의 독특한 특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우리 전통 악기에 아프리카 타악기, 기타와 베이스를 더해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활용했고, 브레히트의 희곡으로부터 뼈대를 빌려왔지만 그 배경을 전통 판소리의 다섯마당 중 하나인 <적벽가>의 삼국시대로 옮겨와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억척스러운 여인의 인생 역정으로 풀어냈다.    

2011년 초연한 <억척가>에 앞서 2008년에 발표한 창작 판소리 <사천가(Sacheon-ga)> 역시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The Good Person of Szechwan)>을 모티브로 지금 시대를 그려낸 작품이다. 21세기 한국, 주인공 순덕이 ‘착하게 살라’는 명제 앞에서 삶의 모순과 싸우는 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세태 외모 지상주의, 학벌 지상주의, 무한경쟁 등 경쾌한 판소리 음악에 담아 풍자한다. (이자람은 이 작품으로 2010년 폴란드 콘탁국제연극제[International Theatre Festival KONTACT]에서 ‘최우수 여배우상’을 수상했다.)

고전을 거울 삼아 지금 시대를 비추어보고, 이 시대의 보편적 고민을 판소리를 통해 풀어낸 이자람의 <사천가><억척가>는 한국뿐 아니라 프랑스, 폴란드, 루마니아, 브라질, 우루과이 등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어 격찬을 받았다. 프랑스 리옹 국립민중극장(Théâtre National Populaire) 2011년부터 매년 이자람을 초청하고 있다.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Kim Soo-hyun: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드라마 씨어터에서 한국의 판소리가 공연된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라 나라 안팎에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이번 공연에 대해 압도적(devastating)이라는 수식어를 쓰며 브레히트도 이 공연을 인정할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더군요. 실제로 보고 느낀 현지 반응이 궁금합니다.

Lee Ja-ram: 판소리가 전혀 낯선 음악 장르인 나라에 가서 이게 판소리고, 이게 코리아야하고 이야기한 기분입니다. 사실 유럽과 남미는 많이 다녔지만 영미권은 처음이라 떨리고 무섭기도 했어요. 극 중간부터 박수가 터져 나와 공연이 중단됐을 정도로, 시쳇말로 빵빵 터져서정말 기분 좋게 공연했습니다. 현지 무대감독이 호주에서 26년째 공연 일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기립 박수를 본 것은 드문 경우라고 하더군요.

KS: 그들은 <억척가>의 어떤 점에 놀라던가요?

LJ: 국내외를 불문하고 관객들이 제 공연을 보고 공통적으로 감탄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한 명의 소리꾼이 여러 등장인물을 모두 연기해내며 장시간 집중력 있게 극을 끌고 간다는 것, 그냥 소리를 내지르는 게 아니라 소리의 풍부한 질감으로 드라마를 전개해나가는 것 등등을 놀라워하지요. 무엇보다도 오래된 전통을 새롭게 탄생시킨 작업에 대해 놀라워합니다. 제 공연 리뷰에 자국의 오페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이 언급된 적도 있어요.

KS: 한국에서는 우리 전통예술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것이 오래된 숙제인데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LJ: 저는 이렇게 화답하고 싶어요.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저는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동시대적이며, 가장 동시대적인 것은 그 사회를 담고 있는 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소위 전통의 대중화와 세계화의 두드러진 예로 자주 언급되지만, 제가 이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저 제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으려 했던 과정을 거쳐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던 것뿐입니다.  

KS: 판소리는 관객들이 공연 중에 얼쑤’ ‘얼씨구‘좋다’ ‘잘한다’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즉각적으로 소리꾼과 소통합니다. 해외 관객들은 추임새를 어떻게 넣는지도 궁금하네요.

LJ: 제가 극 중간에 추임새 넣는 법을 이렇게 가르쳐주곤 합니다. “판소리에는 추임새가 있어요. 관객들이 추임새를 넣으면 소리꾼은 힘과 흥을 얻어요. 알려줄 테니 한 번 따라 해볼까요?” 그러면 관객들은 제게 뭐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추임새 대신 박수라도 열심히 쳐줍니다. 언젠가 극이 끝날 즈음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지금 여러분들과 친구가 된 기분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판소리입니다. 판소리에 대해 알던 모르던 여러분들은 지금 판소리를 경험한 것입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 역시 나의 소명

작년, 이자람은 주요섭(Joo Yo-seop 朱耀燮, 1902-1972) 소설가의 단편소설 두 편을 각색한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An Ugly Person/Murder)>을 새롭게 선보였다. <추물>은 태어날 때부터 흉측한 괴물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추녀의 이야기이며, <살인>은 우연히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된 창부의 이야기다. 또한 마르케스의 소설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Bon Voyage, Mr. President)>을 판소리로 각색해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초연하기도 했다. 이렇듯 끊임 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이자람은 동시에 전통 판소리를 지키는 것 역시 자신의 소명이라 여긴다.

그녀가 판소리에 입문한 나이는 열한 살이다. 어린이 국악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첫 스승인 故 은희진(Eun Hee-jin 殷熙珍, 1947-2000) 명창의 첫 제자이자 수제자가 되어 국악의 정수를 배우게 되었다. 국악중고교를 거쳐 서울대 국악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기까지 정통 판소리꾼의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 1999년에는 20세 최연소의 나이로 판소리 다섯마당의 하나인 <춘향가>를 장장 8시간에 걸쳐 완창해 기네스북에 오른 바 있고,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다.

KS: <사천가>, <억척가> 이후 선보인 작품들에서 변화가 감지되기도 합니다.

LJ: 솔직히 말하면 <억척가>의 성공이 싫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LG아트센터라는 대극장을 홀로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가 너무 버거웠지요. 그래서 한동안 대극장 작품은 하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어요. 제가 좋아하는 판소리의 미덕은 작은 데 있습니다. 그냥 면 치마에 티셔츠 입고 부채 하나 달랑 든 채 빈 무대에 서도 무언가 꽉 차는 감동의 순간을 지향합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요. 작은 무대에서 공연한 <추물/살인>이나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은 판소리 양식에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입니다. 물론 아직 제 나이는 대극장이든 소극장이든 가리지 않아야 할 때이지요. 다행히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희곡이 미국 작가 손톤 와일더(Thornton Wilder) <우리 읍내(Our Town)>인데, 그 작품의 그림이 좀 큽니다. 소극장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그림이 막 떠올라요.

KS: <추물/살인> 2014년 동아연극상(Dong-A Theatre Award)에서 ‘새개념 연극상(New Concept Theatre)’을 비롯해 3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새개념 연극’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LJ: 진심으로 고마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극계가 판소리를 안아준 것이잖습니까. 사실 저는 지금까지 전통음악계에도, 연극계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왔습니다. 이 상이 그게 아니라는 다독임과 인정으로 다가왔습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판소리하는 수많은 후배들이 연극이라는 더 큰 필드에서도 뛰어다닐 수 있었으면 합니다.

KS: 창작 판소리의 외연이 커지고 있는데 반해 전통 판소리의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LJ: 전통 판소리와 창작 판소리의 균형 찾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활동이 창작 판소리 중심으로 자주 노출되지만, 동시에 저는 전통 판소리 활동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어요. 이를테면 매년 가을마다 홍대 앞 이리카페에서 전통 판소리 공연을 개최해왔는데, 객석이 늘 젊은 관객들로 가득 찹니다. 저는 거기서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힘에 부치더라도 꾸준히 계속해나가면 변화를 일으키리라 기대합니다.

KS: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LJ: 우선 통영에서 초연했던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의 서울 공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일본 오키나와 공연이 있고, 내년에는 프랑스 리옹 공연도 예정돼 있어요. <우리 읍내>는 올 연말에 대본을 완성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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