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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살 때, 코미디가 영국인들에게 굉장히 인기 있는 장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살던 곳 근처의 워릭아트센터는 1년 내내 볼만한 공연이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이었는데, 코미디는 여엇한 공연 장르로, 클래식 음악회, 연극, 무용 등 이른바 '정통' 공연 장르와 나란히 프로그램 책자에 소개돼 있었다. 유명 코미디언이 와서 공연하는 날이면 공연장은 만석이었다. 유명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도 참가작 중 가장 많은 장르가 코미디라고 한다. 

공연장에서 코미디를 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에서 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은 가끔 봤다. 코미디는 언어와 문화, 사회상을 제대로 알아야만 즐길 수 있는 장르다. 그래서 속사포처럼 쏴대는 코미디언의 대사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아, 얘네들은 코미디를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감을 잡을 수는 있었다. 영국의 코미디는 정치 빼면 시체였다. 영국 사람들은 코미디언들이 유력 정치인들을 흉내 내거나, 시사 현안을 풍자하는 것을 보면서 박장대소를 하곤 했다. 당시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 같은 경우는 어찌나 웃기게 묘사되는지, 저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편과 같은 과 친구였던 영국인 에드는 영국인들이 이렇게 코미디에 열광하는 것에 착안해 '뮤지컬 코미디 어워드'라는 것을 만들었다. 여기서 '뮤지컬 코미디'라는 건 노래를 한다든지, 악기를 연주한다든지 해서 음악적인 요소를 첨가한 코미디를 뜻한다. 아마추어이든, 직업 코미디언이든, 자신의 뮤지컬 코미디 UCC를 웹사이트(www.musicalcomedyawards.com)에 올리면 네티즌들이 인기 투표를 해서 본선 진출자를 정하고, 이들이 어워드 결선 공연에 참여한다. 수상자들은 클럽이나 축제, 공연장 등에서 공연을 한다. 


'뮤지컬 코미디 어워드'의 아이디어는 사실 문화산업 창업 관련 수업의 과제물로 나온 것이었다. 학생들은 공공자금을 운영하는 펀드 매니저 앞에서 창업 계획서를 발표하도록 돼 있었는데, 이 펀드 매니저가 에드의 아이디어를 높게 평가해 투자를 하겠다고 제의했고, 에드는 졸업 후 '뮤지컬 코미디 어워드' 창립자가 되었다. 


에드가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수완 좋고 머리 좋은 에드는 맥주 회사의 후원을 따내 뮤지컬 코미디 어워드 행사를 몇 해째 치르고 있고,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등 열심히 공연을 열고 있다. 독일어도 유창한 그는 베를린에서도 비슷한 컨셉의 뮤지컬 코미디 공연을 열었다. 그는 뮤지컬 코미디 어워드를 전유럽에 중계되는 행사로 키우는 게 꿈이다. 


에드의 뮤지컬 코미디 어워드가 성공하면 우리도 한국 지사를 하나 차리면 어떨까, 우리는 영국에 있을 때 이런 얘기를 농담삼아 하곤 했다. 실제로 에드는 지난해 이메일로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왔다. 내가 방송국에 다니고 있으니까, 방송계 주변에서 뮤지컬 코미디 어워드에 관심 있는 인사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고 초고속 인터넷 망도 갖춘 한국이니까 뮤지컬 코미디에도 관심이 있지 않겠느냐고.


나는 '힘들 것'이라고 답장해 줬다. '뮤지컬 코미디' 역시 '코미디'의 한 장르라 정치가 소재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에서 시사 현안과 관련해 독설을 퍼붓고 날카롭게 풍자하는 코미디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껏 정치와 관련된 코미디라면, 정치인 성대 모사 정도? 코미디의 주요 소재인 정치를 빼놓으니, 한국의 코미디는 소재가 참 한정돼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코미디는 코미디언 개인의 외모에 집중하는 게 참 많다. 뚱뚱하거나, 키가 아주 작거나, 크거나, 못 생겼거나, 혹은 몸짱이거나, 옷차림이 괴상하거나.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보기 거북할 때도 있다. )

갑자기 코미디 얘기를 쓴 것은, 한 방송국의 '소셜테이너' 출연 금지 조치를 보면서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사회적 발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라면, 코미디언의 정치 풍자 역시 받아들일 수 없을 터이니. 성격이 다른 문제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사 프로그램에 '사회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 출연을 금지시키면 대체 누가 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시사 프로그램 맞는가. 실소를 자아내는 코미디 같은 일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코미디가 번성하지 못하는 건 현실이 더 코미디 같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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