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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일 SBS취재파일로 쓴 글. 박세은 씨 덕분에 파리오페라발레단, 에투알이라는 말이 회자됐는데, 이 발레단과 발레단원 등급 시스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350여년 역사상 첫 한국인 수석무용수가 어떤 의미인지도.

 
파리오페라발레단 사상 첫 아시아인 수석무용수 박세은 씨가 한국에서 공연했습니다. 관련 기사에서 '에투알'이라는 단어를 접하신 분들 많으실 겁니다. '에투알'은 '별'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단어이면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수석무용수 등급 명칭이기도 합니다. 많은 매체들이 박세은 씨를 '파리의 별'로 지칭했던 게 이 때문입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파리국립오페라극장 소속의 발레단입니다. 1669년부터 지금까지, 3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발레의 종가'입니다. 발레는 르네상스 때 이탈리아에서 생겨났지만, 루이 14세 때인 17세기말 프랑스에 최초의 발레단과 발레학교가 생기면서 공연예술로서 기반을 닦고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발레 용어는 다 프랑스어로 되어 있죠. 파리오페라발레단이 바로 이 '최초의 발레단'입니다.

파리국립오페라극장(Opera National De Paris)의 공연장은 '팔레 가르니에'와 '오페라 바스티유'가 있습니다. 팔레 가르니에는 1989년 오페라 바스티유가 새로 문을 열기 전까지 오페라단과 발레단이 공연하던 곳으로 '파리 오페라하우스'로 불렸습니다. 파리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라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현재 발레단은 주로 가르니에에서, 오페라단은 주로 바스티유에서 공연하는데, 현대 발레 작품은 바스티유에서 공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르니에는 그 유명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된 극장이기도 합니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이름을 딴 이 극장은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건립되기 시작해 1875년 당시 세계 최대 규모 오페라극장으로 완공됐는데요, 가스통 르루가 쓴 '오페라의 유령' 원작 소설에 나오는 샹들리에 추락은, 실제로 1896년 이 극장의 샹들리에 설치 작업 도중 기물 일부가 떨어져 인부가 사망한 사고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죠. 뮤지컬에 나오는 지하 호수는 없지만, 대형 저수조가 있다고 하네요.

'에투알'은 이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단원 등급 중 최정상에 있습니다. 이 발레단은 자체 발레학교 출신의 프랑스인 단원이 주류이고 외국인 단원은 많지 않은데요, 외부 지원자의 경우 대개 준단원 과정을 거쳐 정단원으로 입단합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정단원 등급과 현재 인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파리오페라발레단 홈페이지)

카드리유(군무진.54명)->코리페(군무 리더.30명)->쉬제(솔리스트.41명)->프리미에 당쇠즈/당쇠르(제1무용수.13명)->에투알(수석무용수.16명)

박세은 씨의 설명을 직접 들어볼까요.

"파리오페라발레단은 계급사회처럼 등급별로 할 수 있는 배역이 정해져 있어요. 카드리유 코리페 쉬제까지는 군무를 해요. 쉬제는 군무를 하더라도 24명이 하는 큰 군무 말고 8명이나 6명 군무, 이런 걸 하고요, 주역을 맡을 수도 있어서 가끔 기회가 오기도 하는 그런 위치입니다. 프리미에 당쇠즈(제1무용수)는 주역 무용수에 가까운 위치인 것 같아요. 저는 제1무용수 되고 나서 대우가 확실히 달라지는 걸 느꼈고요, 그 위에 에투알은 정말 주역만 맡습니다."

카드리유에서 프리미에 당쇠즈까지는 매년 있는 승급 시험을 통과해야만 다음 등급으로 올라가고, 수석무용수인 에투알은 승급 시험이 아니라, 결원이 생길 때 예술감독이 극장과 상의해 지명하는 시스템입니다. 현재 단원이 150여명이니 에투알은 전체 단원의 10퍼센트 정도입니다. 에투알은 중요한 공연이 끝나고 예고 없이 지명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1무용수가 되고 난 다음부터는 공연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시험대'가 됩니다. 실력은 그야말로 '기본'이고, 결원이 있어야만 뽑기 때문에 타이밍도 중요하고, 예술감독의 지향점과 맞는지도 중요합니다.

발레단 단원 등급은 단체마다 조금씩 명칭과 체계가 다른데요,
한국 국립발레단은 코르드발레(군무)->드미 솔리스트->솔리스트->수석무용수,
영국로열발레단은 아티스트->퍼스트 아티스트-> 솔로이스트->퍼스트 솔로이스트->프린시펄(수석무용수), 이런 식입니다.

수석무용수 명칭은 단체에 따라 '프린시펄'로 부르기도 하고, 파리오페라발레단처럼 '에투알'로 부르기도 합니다. 단체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군무에서 솔리스트, 수석무용수로 이어지는 체계이고, 시간이 지난다고 자동적으로 승급되는 시스템은 아닙니다. 무용수 기량이나 경력에 따라 반드시 군무 등급이 아니라 위 등급으로 입단 가능한 발레단들도 있지만, 자체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오는 무용수들이 대다수인 파리오페라발레단은 입단하면 맨 아래 등급부터 시작해 승급 시험을 치러야만 올라가는 시스템을 원칙으로 합니다.

박세은 씨는 2006년 잭슨 콩쿠르, 2007년 로잔 콩쿠르, 2010년 바르나 콩쿠르 등 주요 국제콩쿠르를 휩쓸면서 일찌감치 미래의 발레 스타로 주목받았습니다. 한국서 학업을 다 마치기도 전에 주역으로 데뷔했고, 다른 해외 유명발레단에서 정단원 입단 제안도 받았지만, 2011년 파리오페라발레단 준단원으로 입단했고, 2012년 정단원이 되어 군무부터 시작했습니다. (발레단의 수준을 결정하는 건 몇몇 스타들만이 아닙니다. 발레에서 군무의 중요성은 절대적이죠. 발레, 하면 흔히 '백조의 호수'나 '지젤'의 군무 장면을 떠올리게 되잖아요. 박세은 씨는 군무로 활동하면서 발레 작품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많은 무대 경험을 쌓았다고 합니다.)

박세은 '로미오와 줄리엣' 중 발코니 파드되


박세은 씨는 에투알 바로 전인 프리미에 당쇠즈(제1무용수)까지는 매년 시험에 잇따라 합격하며 고속 승진했습니다. 사실 2016년 '제1무용수' 승급이 결정됐을 때도 아시아 출신 최초 기록이라고 떠들썩했었죠. 2018년에는 무용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여성 최고무용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1무용수부터 에투알까지는 꼬박 5년이 더 걸렸습니다. 공연에 설 기회가 많아야 하는데 연금 파업과 코로나로 공연 취소가 잇따르면서 좌절하기도 했고, 자체 발레학교를 마치고 10대 때 입단한 동료들보다 나이가 많은 편이라 심적인 부담도 컸다고 하네요. 하지만 묵묵히 춤추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10년만인 지난해 드디어 '별'을 땄습니다. 박세은 씨는 지난해 6월 이 발레단이 코로나 이후 첫 대면공연으로 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 주역으로 열연한 직후 새 에투알로 지명됐습니다. 입단하고 10년만이었습니다. 박세은 씨는 관객과 동료의 축하에 답례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중에 물으니 감사의 눈물이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한예종 무용원 김용걸 교수는 박세은 씨의 에투알 승급이 '역사적 사건'이라며 함께 감격했는데요, 그는 박세은 씨 이전에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춤췄던 한국인 발레리노입니다.

김용걸 씨는 지난 2000년 27살의 늦은 나이에 파리오페라발레단 준단원으로 입단해 아시아 발레리노 최초 기록을 세우며 쉬제까지 승급하고 활동하다, 2009년 한예종 교수로 부임하며 귀국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주역만 하던 김용걸 씨가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건 그만큼 발레의 본고장에서 다양한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1998년 김지영 씨(한국 국립발레단,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역임. 현 경희대 교수)와 함께 1998년 파리 콩쿠르에 출전해 우승한 걸 계기로, 해외 진출을 모색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김용걸 씨의 입단 당시에만 해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으로 활동했던 현 국립발레단장 강수진 씨 외에는 해외 유명발레단의 한국인 수석은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린스키 발레단의 김기민,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서희, 안주원,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최영규, 모나코 몬테카를로 왕립발레단 안재용, 비엔나국립발레단 강효정 씨(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이적) 등등 한국인 수석무용수들이 즐비합니다. 한국에서 학업(대부분 한예종 무용원을 거쳤습니다)을 마친 '국내파'들이 많습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에는 박세은 씨 외에도 한국인 단원 윤서후 씨, 강호현 씨가 있듯이, 지금도 많은 '유망주'들이 성장하고 있고요.

박세은 씨는 파리오페라발레단 동료들과 함께 한 갈라 공연('갈라'는 축제, 혹은 행사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여러 출연자들이 다양한 작품을 모아 공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으로 자신의 '에투알' 첫 시즌을 고국에서 마무리했는데요, 박세은 씨는 에투알 승급 당시 공연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2인무, 그리고 제롬 로빈스가 쇼팽의 음악에 안무한 '인 더 나이트'로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춤을 보여줬습니다.

(*박세은 씨는 지난해 골라듣는뉴스룸 팟캐스트 커튼콜에서 자신이 춤췄던 '로미오와 줄리엣' 하이라이트 영상을 직접 해설하기도 했는데요, 파리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이었던 전설적인 발레리노 누레예프가 안무한 버전입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https://www.youtube.com/watch?v=IGqpfSKEF04

에서 보시면 됩니다. TV프로그램으로 제작된 게 아니라 팟캐스트 녹음하면서 스튜디오 카메라로 쭉 찍은 것인데, 카메라 문제로 초점이 안 맞을 때가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아하고 섬세한 선이 돋보이는 박세은 씨는 에투알이 되기 전에 이미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 '백조의 호수'에서 주역을 맡을 정도로 클래식 작품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스스로도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앞으로는 현대 작품도 더 많이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또 자신의 '강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예전엔 테크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더 섬세한 춤인 것 같고, 그런데 그런 발레 실력을 떠나서, 집념이 강한 것이 결국은 여기까지 오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뭔가 힘들고 잘 안 될 때 포기해 버리는 게 아니고 왜 안될까, 왜 힘들까, 왜 몸이 견디지 못할까, 어떻게 해야 될까, 자꾸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해 왔거든요. 그런 집념 덕분에 좀 더 발레를 즐겁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박세은 씨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예술 속에 푹 빠져서, 좋아하는 춤을 추면서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정년은 42세, 박세은 씨는 '앞으로 10년'이라고 하더라고요. 파리오페라발레단 입단 10년만에 '별'에 오른 그는, '이제부터 진짜 나의 춤이 시작된다'고 했죠. 그리고 '더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10년, 더 빛나는 파리의 별로 더 높이 날아오를 박세은 씨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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