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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푸른 눈의 국악원로'  해의만 선생을 취재해 SBS 8시뉴스에 보도했다. 나로선 꽤 오랫동안 공들여 취재하고 쓴 기사라 애착이 가는 리포트였다. 리포트는 해의만 선생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겠지만, 일단 글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해의만 선생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지난해 말이었던 것 같다. 문화부에 돌아왔다고 국립국악원에 근무하는 지인한테 안부 전화하던 와중에, 본래 미국인인데 한국에 오래 산 국악계 원로가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과거에 국악 취재도 몇 년 한 적이 있는데,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 지인은 ‘해의만 선생님 아드님도 국악원에 근무하시는 걸요’라고 귀띔해줬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해의만 선생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는데, 국악 전문지와 주간지에 기사가 나간 것 외에는 상당 기간 동안 언론에 등장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와 지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해의만 선생을 꼭 인터뷰해야겠다는 의욕이 솟아났다.

올해 팔순의 해의만 선생은 본래 ‘알란 헤이먼’이라는 이름의 독일계 미국인이었다.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공부한 서양 음악도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우연히 접한 국악을 잊지 못해 1960년부터 한국에 정착해 국악을 공부했다. 국악예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소리와 악기연주를 두루 배웠다.

1964년 한국 전통예술단의 미국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1970년대 국악단 유럽 순회공연에도 동행했으며, 영국 에딘버러 대학 민속음악 학자 존 리비의 한국 전통음악 음반 녹음을 주선하기도 했다. 또 귀중한 국악 자료 수집과 연구, 국악 도서 영역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한국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1995년에는 법적으로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나는 해의만 선생 얘기를 처음 해준 지인을 통해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가능하면 해의만 선생과 아들을 같이 취재하고 싶다는 뜻도 전했다. 그런데 대답은 ‘사양하겠다’는 것이었다. 해의만 선생은 노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거의 집에만 있다며, 인터뷰는 힘들다고 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해의만 선생은 TV 인터뷰에 대한 피해 의식이 있었다. 몇 년 전 해의만 선생은 얼떨결에 한 TV 프로그램에 등장한 적이 있다고 했다. 커다란 비닐 백을 들고 다니며 남이 버린 물건도 주워오고, 집에 온갖 자료와 물품을 모아놓는 수집벽 때문에 ‘걸인’으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졸지에 ‘남의 나라에서 구걸하러 다니는 괴짜 서양인 할아버지’가 돼버린 선생은 이후 방송 기피증이 생겼다고 했다.

우리는 뉴스니까 다르다고, 그러니까 인터뷰에 응해달라고 다시 요청해 봤지만, 역시 사양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더 이상 조를 수도 없는 상황인 것 같아 일단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몇 달 후 국립국악원 개원 60주년 기념식 보도자료에서 해의만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선생은 기념식에서 은관 문화훈장을 받게 돼 있었다. 그간 수집한 국악 자료를 기증한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했다.

기념식은 사실 그 자체로는 큰 기사가 안 되지만, 해의만 선생이 훈장을 받기 위해 참석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국악원으로 달려갔다. 직접 만나서 부탁하면 인터뷰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의만 선생은 아들의 부축을 받고 나타났다. 실제로 보니 허리가 거의 90도로 굽어 정말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훈장을 받으러 단상 위에 올라가 서 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선생이 너무나 힘들어 보여 안쓰러웠다. 미리 약속을 하고 간 건 아니었지만 훈장을 목에 걸고 기념식장을 나서는 선생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훈장 받으신 걸 축하 드린다고. SBS 김수현 기자라고 하는데, 선생님 인터뷰하고 싶어서 왔다고.

잔뜩 긴장하고 갔는데 의외로 일은 쉽게 풀렸다. 물론 방송 기자라는 말에 약간 인상을 찌푸린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선생은 경사스런 날 나타난 나를 박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처음 만난 선생에게 약간의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백발에 한복 차림이었고, 노령으로 발음은 어눌했지만 한국어를 큰 불편 없이 구사했다.

나는 국악원 로비 의자에 앉아 몇 분간 이야기를 나눈 끝에 후일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어차피 방송 뉴스를 편집하려면 다양한 영상이 필요하다. 그가 국악 연구, 번역을 하는 모습이라든지, 그가 기증한 자료가 있는 국악원을 방문하는 모습이라든지, 이런 영상을 촬영하려면 당장은 힘든 일이었다.

요즘 거의 외출을 안 한다는 선생이 국립국악원 공연을 보러 나올 때, 미리 연락해서 인터뷰 일자를 다시 정하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자택에 가서 모시고 나오겠다고도 했다. 전화번호를 선생한테 주고 선생의 자택 전화번호를 받으면서, 나는 ‘꼭 전화해 주세요. 기다릴게요’ 하고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만남 이후 한동안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괜히 조바심 낼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빨리빨리’가 익숙하지 않다. 내가 먼저 채근하지 말고 선생의 ‘리듬’에 맞춰야 할 것 같았다. 그저 국악원에 근무하는 아들을 통해 안부를 물어보는 정도에 그쳤다.

한 달 이상 시간이 흘렀을 무렵, 드디어 선생의 전화가 걸려왔다. 약간 어눌한 그 말투가 어찌나 반갑던지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그런데 선생은 인터뷰 얘기는 꺼내지 않고, 5월 말에 자택에서 팔순 잔치를 한다고 했다. 팔순 잔치 때 와서 취재하라는 뜻인가.

“어머, 축하 드려요. 그런데 잔치 때 취재를 가도 괜찮을까요? 저희가 가면 잔치 하시는데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요?”

“아아, 그래도 돼요. 그냥 아는 사람들 몇 명 오는 건데…..”

선생은 그러더니 ‘그 다음날 경복궁에서 열리는 세종조 회례연을 볼 예정’이라고 본론을 꺼낸다. 그러고 보니 팔순 잔치 때 ‘취재’를 하러 오라는 뜻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잔치에 그냥 오라는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마운 일이지만, 난 선생의 팔순 잔치에 낄 만한 자격은 없는 것 같아 잔치 다음날 자택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5월 29일, 더위가 맹위를 떨친 일요일, 나는 음료수를 사 들고 선생의 자택인 화곡동의 한 아파트에 찾아갔다. 카메라 기자 공진구 씨가 함께 했다. 선생은 여전히 한복 차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은 어딜 가든 한복을 고수한다고 했다. 먼저 번역 작업—선생은 바로 전날 그 동안 작업했던 무속 관련 책의 영역 원고를 탈고해 넘겼다고 한다--을 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선생은 컴퓨터를 쓰지 않고 깨알 같은 글씨를 직접 종이에 꾹꾹 눌러 적어 넣었다.

그리고는 서재에 쌓아놓은 국악 관련 자료들, 옛날 사진들을 촬영했다. 젊은 시절 사진을 보니 선생은 태평소는 물론이고 가야금, 장구, 거문고, 꽹과리 등등 굉장히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 이제는 나이 들어 연주는 안 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선생은 인터뷰 도중 시조의 한 대목을 불러 들려주기도 했다.

(과연 글이 길어지고 있다. 인터뷰 내용과 이후의 취재기는 다음 글에 이어가려 한다. 이 글은 SBS 뉴스 취재파일로도 송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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