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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열리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내한공연 '지젤'이 요즘 ‘세계 3대 발레단’이라는 문구로 홍보되고 있습니다. 세계 3대 발레단은 과연 어디일까요? '지젤' 홍보팀은 아마도 영국의 로열 발레단, 프랑스의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 함께 미국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이 세 단체를 꼽는 모양인데, 발레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가 좋은 발레단이라는 건 맞지만, 홍보하느라 무리하게 ‘세계 3대 발레단’이라는 말을 갖다 붙였다는 겁니다. 


저는 또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지젤'이 '오리지널 지젤'로 소개되고 있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원래 ‘오리지널’은 초연 당시 프로덕션이나 출연진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입니다.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프로덕션, 오리지널 캐스트,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뮤지컬이건 발레건 오페라건 외국팀 공연이기만 하면 모두 다 ‘오리지널’이 돼버립니다.

음악. 무용 칼럼니스트 유형종 씨는 지금 공연되는 발레나 오페라에서 ‘오리지널’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설명합니다. 오래 전 초연된 작품에 ‘오리지널 프로덕션’이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궁색하긴 하지만, 혹시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지젤 버전을 국내 단체가 들여와 공연한다면, 국내 단체 공연과 비교해서 이를 '상대적으로'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는 있을까요? '오리지널’이라는 말이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남용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씨는 ‘한국에서만 쓰는 마케팅 수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문화부에서 취재하다 보니 이렇게 마케팅 때문에 쓰이는 수사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세계 몇 대’ 참 좋아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세계 3대 로맨스 소설’이라는 게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영화 담당하는 후배 기자 말로는, 개봉을 앞둔 영화 '폭풍의 언덕' 원작이 3대 로맨스 소설이라고 홍보하고 있답니다. '오만와 편견', '제인 에어'가 나머지 3대 로맨스 소설이고요. 영국 어디서 선정한 거라는데요, '폭풍의 언덕'은 그 자체로 빼어난 소설인데, 꼭 그렇게 ‘3대 로맨스 소설’이라는 말을 가져와야만 하는 걸까요?

최근에 발레리나 강수진이 출연한 '카멜리아 레이디'로 한국을 다녀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예전 내한공연 때 ‘세계 5대 발레단’으로 지칭된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5대 발레단’이 과연 어느 단체들을 가리키는 건지, 얘기하는 사람마다 달랐다는 겁니다. ‘세계 5대 발레단’은 공연 홍보를 위해서 자의적으로 동원된 문구였고, 정작 발레계에서는 공감대가 없는 말이었거든요.이미지예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디즈니 뮤지컬 '미녀와 야수'는 한국에 들어올 때 ‘세계 5대 뮤지컬’로 홍보됐습니다. 뮤지컬 ‘빅 4’로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 '캣츠'를 꼽기는 하지만, ‘세계 5대 뮤지컬’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당시 공연 관계자들에게 물으니 ‘세계 5대 뮤지컬’이라는 홍보 문구를 사용할 것인지를 놓고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오페라의 유령' 한국 초연이 성공을 거두고 난 후, '오페라의 유령' 때와 같은 고급 이미지로 마케팅을 전개하려다 보니 ‘세계 5대 뮤지컬’로 홍보 컨셉을 정하게 됐다는 겁니다.

유명한 소프라노 캐슬린 배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흑인 3대 소프라노'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흑인 3대 소프라노'라면, 캐슬린 배틀과 바바라 핸드릭스, 제시 노먼을 지칭한 말이 아닐까 짐작은 가지만, 별로 탐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흑인 3대 소프라노'를 따로 꼽는다면 '백인 3대 소프라노'도 꼽아야 하는 건가요? 만약 이렇게 거론된 본인들에게 묻는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표현일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끝도 없습니다. 2000년대 초반 소프라노 신영옥이 도이치 오퍼 베를린과 함께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했을 때, ‘도이치 오퍼 베를린’은 라 스칼라, 메트로폴리탄과 함께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홍보됐습니다. 역시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술의전당은 오래 전 신년 사업계획을 밝히는 기자회견장에서 ‘세계 10대 아트센터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밝힌 적도 있습니다. 과연 세계 10대 아트센터가 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매출액에서 10위 안에 든다는 얘기일까요? 규모? 관객 수? 예산? 공연 수? 그럼 10대 아트센터에 들어가는 주요 아트센터가 어디냐는 제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실은 저도 기사를 쓸 때 ‘세계 몇 대’라는 문구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진부한 줄은 알지만, 최소한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통용되는 표현이라면, 이런 문구가 기사에 구체성과 신뢰성을 더해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지요. 세계에서 세 손가락,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 즉 '세계 3대’ 혹은 ‘세계 5대’,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냥 훌륭하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들리니까요.

'세계 몇 대'라는 표현에는 순위 매기기와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돼 있습니다. 이 '몇 대'에서 빠지는 대상은 순위에서 뒤쳐지는 겁니다. 예술 분야에서도 '순위 매기기'는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각종 콩쿠르에서는 예술가들에게 순위를 매겨 시상합니다. 그리고 이 콩쿠르 자체에도 '세계 몇 대 콩쿠르' 운운하는 딱지가 붙게 됩니다. 

물론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나 그렇지만, 예술 분야에서도 불가피한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가 뽑은 세계 10대 오케스트라, 20세기 100대 영화, 뭐 이런 순위들이 종종 발표되곤 하잖아요. 이런 순위가 ‘참고’는 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세계 몇 대’에 너무 집착하는 게 예술의 본질을 흐린다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홍보의 필요성 때문에 뚜렷한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세계 몇 대'라면, 그것처럼 의미 없는 정보가 또 있을까요?

그런데도 현실은 대형 공연 때마다 이런 표현이 난무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예술의전당에 갔다가 외벽에 걸린 대형 배너에 큼지막하게 쓰여진 ‘세계 3대 발레단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라는 문구를 보고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들이 유난히 '유명세'에 약해서 이런 홍보 문구가 특별히 더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볼쇼이 발레단의 전설적인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처음 한국의 국립발레단과 공동작업을 할 때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국립발레단 수준이, 볼쇼이 발레단과 비교해서 어떤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일갈했습니다.이미지"그런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어요. 한국의 국립 발레단과 러시아의 볼쇼이 발레단은 서로 '다른' 발레단입니다. 국립은 국립의 발레가 있고, 볼쇼이는 볼쇼이의 발레가 있어요."

오래 전 첼리스트 장한나와 인터뷰하며 들었던 이야기도 생생합니다.

"저는 남과 비교해서 제 연주가 어떻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아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제 길을, 제 속도로 갈 거예요.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어떤 사물이 두 개 있으면 이 두 개를 비교하게 마련이지만, 비교하기 시작하면 이 사물의 본질은 사라진다'고요."

이런데도 볼쇼이 발레단이나 한국의 국립발레단이 세계 몇 대 발레단인지, 혹은 첼리스트 장한나가 몇 대 첼리스트인지 따지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다녀온 여수 시내 곳곳에서 ‘세계 4대 미항 여수’라는 문구를 여러 차례 봤던 기억이 납니다. 엑스포가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이벤트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세계 3대 이벤트가 열린 세계 4대 미항 여수’가 되는 거군요. 최근 포항시에서도 ‘세계 4대 미항’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우리끼리 ‘세계 4대 미항’을 놓고 복닥거리고 있는 셈이네요.

돌이켜보면 제주도의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을 둘러싼 소동도 그렇게 벌어진 거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되면 당장 엄청난 이익을 볼 것처럼, 온 국민의 숙원 사업인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과연 그런가요? ‘세계 몇 대’에 집착하느라 우린 정작 중요한 본질을 자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SBS 뉴스사이트 취재파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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