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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북미 투어 취재기 두번째 글입니다.SBS 뉴스 웹사이트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서울시향의 북미 투어를 동행 취재하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공연은 단순히 연주자가 일방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관객이 앉아서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 공연장과 객석의 분위기 등 여러 요인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생물체 같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게 바로 ‘라이브’의 어려운 점이기도 하고, 매력이기도 하겠지요.
앞선 글에서 밴쿠버 공연이 아쉬웠다고 쓴 바 있는데, 전반적으로는 괜찮았고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웠지만, 미묘하게 조금씩 어긋나는 부분도 있었고 작은 실수도 눈에 띄는 등 서울시향의 베스트를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게 이 날 객석의 분위기와 약간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제 앞줄과 뒷줄에는 각각 공연 도중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관객들이 앉아 있었고, 연주되는 멜로디를 옆에서도 들릴 정도로 흥얼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객석이 어딘가 산만한 느낌이었죠.
시애틀 공연은 밴쿠버 공연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일정이 굉장히 빠듯해서 걱정스러웠는데, 시애틀 공연에서는 똑같은 곡을 연주하는데도 너무나 느낌이 달라서 저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밴쿠버보다는 시애틀 관객들이 좀 더 진지하고 좀 더 몰입해서 음악을 즐기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물론 밴쿠버에도 진지한 관객들이 많았겠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시애틀 쪽이 훨씬 좋았다는 얘깁니다. 참 희한한 게 저한테도 그 '공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오케스트라도 시애틀에서 훨씬 집중도 높은 연주를 들려줬습니다.
공연장도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시애틀 베나로야 홀은 제가 가본 콘서트홀 가운데 음향이 최고였습니다.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도 음향 좋기로 소문난 곳이라는데, 개인적으로는 시애틀 베나로야 홀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밴쿠버의 오피엄 시어터는 다목적 공연장으로 음향이 그다지 좋다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시애틀에서 들은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은, 작곡가 자신도 ‘내가 쓴 음표 하나하나가 다 들린다’고 감탄했을 정도로, 선명한 음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생황 협주곡에는 피아노의 현을 긁어서 내는 소리, 물을 휘젓는 소리나 종이를 구기는 소리 등 갖가지 소리가 등장하는데, 이런 다양한 사운드가 아주 생생하게, 무대에서 날아와 귀에 쏙쏙 박혔습니다. 바로 전날 밴쿠버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던 소리를 시애틀에서는 새롭게 발견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생황 협주곡을 유럽 투어에서부터 여러 차례 들었는데, 시애틀 연주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다른 곡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는 시애틀의 이 홀에서 너무나 찬란하고 생생하게 들려서 새로웠습니다. 깨끗하고 선명한 사운드를 자랑하는 공연장은, 작은 실수까지도 명확하게 드러내 연주자들에게는 그만큼 어렵고 부담스러운 공연장이기도 합니다. 서울시향은 시애틀에서 물을 만난 듯 아주 선명하고 깨끗한 사운드를 들려줬습니다. 훌륭한 공연장에 잘 어울리는,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서울시향은 자체 콘서트홀이 없습니다. 이번에 서울시향이 연주한 시애틀 베나로야 홀에는 시애틀 심포니,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는 LA 필하모닉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밴쿠버 오피엄 시어터 역시, 클래식 전용 공연장이 아니라 다목적 공연장이긴 하지만, 밴쿠버 심포니가 상주하는 공연장입니다. 웬만한 해외 오케스트라는 대부분 전용 공연장이 있는 셈입니다.
서울시향은 주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대관해 정기 연주회를 열고 있는데요, 전용 공연장이 아니다 보니 프로그램 운용에 제약이 많습니다. 물론 예술의전당에서 일찍 대관을 해주는 등의 편의를 제공하고는 있습니다만, 자기 공연장을 가진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죠. 게다가 정기 연주회 말고도 다양한 다른 프로그램을 운용하려 할 때마다 일정과 조건에 맞는 공연장을 새로 섭외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올해 초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 때, 이 오케스트라의 조엘 이든 프리드 예술감독이 ‘성공 비결’로 제일 처음 든 게 바로 좋은 콘서트홀이었습니다. 좋은 사운드를 가진 최고의 콘서트홀이 있어서 오케스트라 연주도 그만큼 좋아지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마치 실내악 앙상블처럼 연주자들이 서로의 연주를 듣는 전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객원 지휘를 맡았던 정명훈 씨가 이를 받아서 했던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 꿈이 뭐냐고 물어보시는데, 저는 꿈이 없다고 얘기해요. 벌써 꿈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암스테르담 콘서트홀 얘기가 나왔잖아요. 어떻게 해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가 이렇게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됐느냐 물으니까 첫 대답이 콘서트홀이었잖아요. 콘서트홀은 오케스트라의 악기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소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 소리를 기억하면서 계속 발전하는 거예요. 전 지금 다른 건 원하는 게 없어요. 우리나라 서울시향을 어떻게 해서라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제 꿈이라는 건 단 한 가지, 콘서트홀이 생겼으면 제일 좋겠습니다.”
정명훈 씨는 LA 공연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라 성공의 조건은 좋은 지휘자, 좋은 단원, 좋은 콘서트홀이라고 일관되게 이야기해왔습니다. 그가 처음 서울시향에 예술감독으로 취임할 때 내세운 조건이 바로 ‘전용 콘서트홀 확보’였습니다. 서울시는 이명박,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노들섬 오페라하우스라는 거창한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환경과 교통, 접근성, 재원 문제로 논란을 빚었습니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 대신 텃밭을 조성하겠다는 발표가 나면서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무산됐습니다.
정명훈 씨는 ‘서울시향 전용 콘서트홀’이 꿈이라고 말하고, 서울시향 직원들은 입버릇처럼 ‘언제 우리가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 지어 달라고 했나? 적당한 곳에 적당한 규모의 콘서트홀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외고 다닙니다. 저는 이번 투어 취재를 통해 콘서트홀이 오케스트라의 악기라는 말을 정말 실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시향은 현재 전용 공연장은커녕 연습실도 부족하고 열악한 상황이라는 게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베나로야 홀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모두 개인과 기업 후원자의 기부로 지어진 공연장입니다. 공연장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베나로야 홀은 레바논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부동산 개발업으로 거부가 된 잭 베나로야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1993년, 잭 베나로야는 <시애틀 타임즈>에서 전용 콘서트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기사를 읽고 나서 당시 시애틀 심포니의 예술 감독을 찾아갑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용 콘서트홀을 짓는 데 거액을 기부할 것을 약속합니다.
잭 베나로야는 1,500만 달러를 베나로야 재단을 통해 기부하고, 개인적으로도 시애틀 심포니의 운영 적자를 메우기 위해 80만 달러를 내놨습니다. 다른 후원자들도 콘서트홀 건립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습니다. 2500석과 540석짜리 극장 두 곳으로 이뤄진 베나로야 홀은 시애틀의 대표적인 문화적 명소가 됐을 뿐 아니라 도심 재생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시애틀 심포니는 이전에는 발레단, 오페라단과 함께 시애틀 센터 오페라 하우스를 나눠 쓰고 있었습니다. 클래식 음악 전용 공연장이 아니다 보니 지나치게 규모가 큰 데다 여러 단체가 함께 써서 프로그래밍에도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베나로야 홀이 1998년 개관한 이후, 시애틀 심포니의 연간 공연 횟수는 100회에서 220회로 늘었고, 첫 시즌에만 오케스트라 회원이 50퍼센트 증가했습니다. 시애틀 심포니는 현재 연간 20개에 이르는 다양한 콘서트 시리즈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애틀 심포니는 또 2001년부터는 베나로야 홀 안에 ‘Soundbridge’로 불리는 시애틀 심포니 뮤직 디스커버리 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멀티 미디어를 활용한 학습, 놀이를 통해 음악을 재미있게 접할 수 있고, 음악 동아리 운영, 리사이틀 개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공간입니다. 전용 콘서트홀을 갖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런 사례들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하고픈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3편 곧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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