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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SBS의 ‘영재발굴단’ 프로그램이었다. 피아니스트 김두민 얘기다. 청주의 평범한 가정 출신인 ‘피아노 영재’ 김두민은 지난 2016년 13살의 나이에 프랑스 유명 음악학교 에꼴 노르말에 최연소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음악교육신문에 작게 기사가 났고, 이를 본 영재발굴단 작가가 출국을 사흘 앞두고 있던 김두민에게 연락해 프로그램 출연을 요청했다. 처음엔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좋은 추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출국 일자를 며칠 미루고 촬영에 응했다.
영재발굴단 김두민 편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에게는 선천성 백내장으로 왼쪽 시력을 잃어 생긴 ‘시야 장애’ 가 있었다. 피아노 연주에 핸디캡이지만, 남다른 재능과 노력까지 갖춘 김두민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 믿는다’는 긍정적인 태도, 자신의 꿈을 위해 애쓰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도 감동적이었다. 김두민의 어머니는 파리에서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아버지는 한국에 홀로 남아 직장생활을 한다. 김두민이 ‘아버지의 외로움의 대가’로 번 돈이라며, 아이스크림 사먹은 것도 후회했다는 일화가 인상적이었다.
방송 이후, 넉넉지 않은 김두민의 유학 비용을 돕겠다는 익명의 후원자가 나섰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영재발굴단’이 이어준 ‘인연’이었다. 또 다른 ‘인연’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왔다. 영재발굴단을 본 워너뮤직 코리아의 클래식 담당자가 프랑스 본사에 김두민을 추천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당시 ‘신동’이라는 제목의 클래식 오디션 프로그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 담당자는 ‘마침 파리 유학 중인 한국인 신동이 있으니 이 프로그램 출연을 주선하면 어떻겠느냐’고 본사에 제안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김두민이 다니는 ‘에꼴 노르말’은 워너뮤직 본사와 멀지 않았다. 2017년 초, 워너뮤직의 클래식 담당 사장과 부사장이 에꼴 노르말을 찾았다. 김두민의 표현에 따르면, ‘네 연주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만 듣고 ‘어떤 할아버지 두 분 앞에서’ 연주를 했다. 이 ‘오디션’이 끝난 후, 워너뮤직 한국 지사에 본사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He is sensational!” 우승자에게 음반 녹음 특전이 주어지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갈 필요도 없이, 바로 김두민의 음반을 내기로 했다고 알려왔다.
2019년 8월 전세계에서 발매된 김두민의 데뷔 음반은 이렇게 탄생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작품까지 포함해, 멘델스존만으로 첫 음반을 완성했다. 김두민은 지금 만 16살이다. 이른바 ‘3대 메이저 클래식 음반사’에서 음반을 낸 한국인 피아니스트 중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데뷔 음반 발매에 맞춰 한국에서 첫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두민은 난생 처음으로 양복에 넥타이를 갖춰 입었다.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는 데에는 거침이 없었다. 음반에 대해 ‘지금이라면 조금 더 짚고 넘어갈 디테일들이 있지만, 그 당시로서는 수작이라고 스스로 평가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저는 어떻게 쳤느냐 하는 그 ‘퀄리티’보다는 만 14살, 지금보다 더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마인드’에서 나온 음악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녹음할 때 부족한 점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제가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집중했어요. 14살의 어린 에너지, 순수함, 이런 것들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첫 음반 발매와 함께 지난 9월 20일 예술의전당에서 첫 독주회를 마친 김두민은 벌써 다음 음반 녹음도 마친 상태다. 내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워너에서 발매될 100장짜리 베토벤 전집에 포함될 두 장의 녹음에 참여한 것이다. 김두민은 독주회에서도 첫 음반의 멘델스존과 함께 베토벤의 곡을 골랐다.
“베토벤은 개인적으로 저와 가장 정서가 잘 맞는 작곡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라는, 베토벤의 인생과 음악에 포함되어 있는 이 ‘시그니쳐’ 같은 문장에 정말 공감이 가고, 이를 표현하는 걸 정말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김두민이 그 동안 걸어온 길 곳곳에 ‘베토벤’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머니와 함께 청주에서 열린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를 보러 갔다가, 반드시 피아니스트가 되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김두민은 또 베토벤 곡을 연주하다가 ‘베토벤이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3악장을 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뭔가 제 팔에 흐르고, 이게 피아노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악보에서 감정이 느껴졌고, 그 감정 때문에 연습을 계속하지 못하고 멈췄어요. 무섭고 당황스럽고 절망스럽고 가슴이 아리고, 그런 느낌이 들었죠. 그런데 피아노를 안 치면 더 심해지고, 피아노를 치니까 해소되는 느낌인 거예요. 베토벤이 제 안에 들어왔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어요”
피아니스트로 첫발을 뗀 김두민은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중요한 콩쿠르 몇 곳에 나가볼 계획이라고 했다. 상을 받으면 물론 좋겠지만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의 평을 듣는 게 좋아서라고 한다. 지휘도, 작곡도 공부해 보고 싶다고 했다. ‘목표’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예술가로서 이름 알리고, 음반 내고, 공연 하고, 그런 것도 성공 기준이지만, 저한테는 그보다 제 자신의 음악에 좀 더 가까워지고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게 기쁘고 중요한 일이죠. 제 음악이 좀 더 깊어지고 사람의 감정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봐요. 그렇다면 완전한 성공이란 없는 거죠. 음악은 끝이 없는 거고, 파다 보면 계속 나오는 거고. 그러니까 계속 발전하면서 음악을 하는 게 제 목표예요”
김두민은 자신이 피아노를 선택한 게 아니라 피아노가 자신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에게 피아노는 ‘운명’이다. SBS 영재발굴단 출연 이후 그에게 벌어진 일들 역시 운명 같다. 남다른 실력에 절묘한 인연이 합을 맞춘 운명! 나는 영재발굴단이 단초가 된 김두민의 음반 데뷔 사연을 SBS 8뉴스에 보도했고, 영재발굴단은 3년만에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김두민을 다시 취재해 9월 18일 방영했다.
김두민이 ‘영재’를 뛰어넘어 계속 발전하는 음악가가 되기를, 계속 깊어지는 음악으로 사람의 감정의 문을 두드리는 음악가가 되기를 기원한다.
*피아니스트 김두민을 취재하고 나서, 클럽발코니 매거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조금 늦게 올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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