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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뷰티’로 1999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샘 멘데스는 연극과 뮤지컬 연출가로도 유명하다. 샘 멘데스는 최근 영국 내셔널 시어터가 제작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연출했다. 샘 멘데스의 ‘리어 왕’은
현대적인 무대와 의상, 강력한 음악이 어우러져 원작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리어 왕을 연기한 배우 사이먼 러셀 빌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무대를 장악한다. 최고의 연출과 배우가 만났으니 과연 영국 언론들이 앞다퉈 격찬할 만했다.
나는 이 공연을 중학교 3학년 딸과 함께 관람했다. ‘리어
왕’을 예전에 책으로 읽기는 했지만, 실제 공연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잘 만든 공연의 힘은 컸다. 책으로
볼 때 별 감흥이 없었던 대사가 무대 위에서 생명력을 얻었다. 처음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딸도 네
시간 가까이 되는 공연 시간 내내 재미있게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사가 하나같이 주옥 같아. 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하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이 공연을 딸 데리고 비행기 타고 영국까지 날아가 본 게 아니다. 서울 장충동에 위치한
국립극장에서 봤다. 영국 내셔널 시어터가 실시하고 있는 공연실황 중계 ‘NT라이브’가 한국에도 들어온 덕분이다. 2009년에 시작된 ‘NT라이브’는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과 북미 지역의 500여 개 극장에서 ‘프랑켄슈타인’ ‘워 호스’ 등 수많은 화제의 연극들을 선보여왔다. 국립극장은 이 중 ‘워 호스’와
‘코리올라누스’ ‘리어 왕’을
한국에서 상영했다.
한국에서는 시차를 두고 소개된 녹화 영상이긴 했지만, 공연 전후 객석의 모습과 배우 인터뷰
등 생생한 현장 영상이 포함됐다. 중간 휴식 시간에 리어 왕이 치매 증상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전문가의 의견과 리어 왕을 연기한 사이먼 러셀 빌의 인물 해석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더 흥미로웠다. 물론
영국에 직접 가서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렇게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그것도 만 5천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한국어로 번역된 대사 자막까지 곁들여서.
내셔널 시어터만 그런 게 아니다. 요즘은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오페라를 볼 수도 있다. 많은 오페라 가수와 팬들에게 ‘꿈의 무대’로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 실황은 ‘메트: 라이브 인 HD’ 시리즈로 전세계 영화관에서 상영된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게 지난 2007년인데, 요즘도 메가박스 일부 상영관에서 볼 수 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개막작이 생중계되기도 하고, 빈 필 신년 음악회, 발레 등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디지털 콘서트홀’은
집 근처 영화관에 가는 수고조차 들일 필요가 없다. 전세계 어디서든 인터넷에 연결된 스크린만 있으면
베를린 필의 음악회를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다. 한화 20만원
정도를 내고 ‘디지털 콘서트홀’의 연간 회원이 되면 한 시즌 40회의 공연 생중계는 물론이고, 250편의 과거 공연 영상, 또 인터뷰 영상과 다큐멘터리를 마음껏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내 방에서 즐기는’ 베를린 필 콘서트다.
그런데 공연 영상 중계는 상당한 자본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 만큼, 그 자체로 공연단체에
엄청난 돈을 벌어주는 사업이라고 하긴 어렵다. 물론 수익 창출도 목적이겠지만, 기존의 브랜드를 더욱 강화하면서 새로운 관객층을 개발하는 효과가 더 큰 사업이다. 메트 오페라의 극장 상영이 확대되면서, 메트 오페라 ‘공연’을 보러 오페라극장에 오는 관객도 함께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이렇게 스크린으로 만나는 공연들은 기존의 소수 유명 브랜드를 더 강화하고, 시장 지배력도
전세계로 확대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나는 메트 오페라의 공연을 스크린으로 자주 보는 오페라 팬들이
정작 국내 제작 오페라 공연은 보지 않는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본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메트 오페라를
중계하는 극장이 많아지면서 미국의 지역 오페라단들이 관객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러니 ‘발달된 기술 덕분에 공연이 스크린을 통해 폭넓은 대중을 만날 수 있게 됐다’는 말은 현재로서는 일부 공연단체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공연영상 제작
전송을 위한 대규모 자본과 인력을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기본이고, ‘직접 가보지 못하니 영상으로라도
보고 싶다’는 욕구를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킬 정도로 ‘브랜드’가 매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예술의전당이 공연영상을
제작해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했으나, 아직 성과를 거론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소수 유명단체에 국한된 얘기이긴 하지만, 해외에서 열린 공연을 국내에서 편안히 볼
수 있게 됐다는 건 공연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반가운 일이다. 뉴욕에, 런던에, 베를린에 가지 않아도 메트 오페라와 내셔널 시어터, 베를린 필의 공연을 볼 수 있는 세상이라니. 공연 취재를 그만두고
한동안 공연을 보지 못해 느꼈던 갈증을 NT라이브 ‘리어
왕’으로 풀었으니, 다음엔 가까운 영화관으로 오페라 한 편
보러 가야겠다.
*방송기자클럽회보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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