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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월간지 편집자로부터 청탁을 받고 쓴 아르헤리치-마이스키 듀오 공연 프리뷰. 아버지가 위독하신 중에 이 원고를 쓰느라 며칠 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럴 때 하필이면' 하다가도, '그나마 이거라도 있어서 뭔가 매달릴 수 있게 해 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원고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이 공연이 취소되어 버렸다. 아르헤리치 여사의 건강 문제 때문이란다. 결국 이 공연은 미샤 마이스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공연으로 대체되었다. 예술의전당 월간지 5월호는 공연이 취소되기 전에 이미 인쇄에 들어가 이 원고가 실리기는 했다. 열리지 않을 공연을 위한 프리뷰 원고라. 이런 일도 있구나. 허망하고 아쉬워서 블로그에 옮겨왔다**


예술의전당에서 5월에 열리는 공연의 소개 원고를 써달라는 얘기에 그러겠다고 덜컥 대답한 게 한참 전이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마감이 코앞에 다가와서야 겨우 쓰기 시작할 엄두를 냈다. 돌이켜 보니 내가 이 공연에 관해 무슨 얘기를 더 보탤 수 있을까 싶어서 미루고 미뤄왔던 것 같다. 무슨 공연이냐고? 바로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미샤 마이스키의 듀오 공연이다. 


진정한 골든 듀오가 선사하는 골든 뮤직의 진수” 

이 공연의 홍보 문구다
. 그냥 골든 듀오가 아니라 진정한골든 듀오다. 그냥 골든 뮤직이 아니라 골든 뮤직의 진수. 어찌 보면 동어 반복에, 진부하고 촌스럽다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의 듀오 공연이다 보니 고심하다 이런 표현이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1941
년 아르헨티나 태생의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피아노의 여제’, ‘피아노의 마녀로 불려온 피아니스트다.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묘사하기 위해 많이 동원된 단어가 바로 활화산이다. 젊은 시절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말 그대로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열정을 발산했던 그녀는 1983년 이후 독주는 하지 않고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협연에 주력하며 보다 여유롭고 원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 1948년 옛 소련 연방 라트비아 태생이다. 미샤 마이스키라 하면, 이세이 미야케가 디자인한 하늘거리는 실크 블라우스나 화려한 무대 매너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풍부한 감성과 완벽한 기교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 첼로의 거장이라는 사실이다. 장한나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손꼽히는 친한파연주자다. 한국 가곡 그리운 금강산’ ‘청산에 살리라를 녹음했고, 한복을 입은 사진을 음반 표지에 썼다

사실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미샤 마이스키를 이렇게
소개한다는 건 너무나 잘 알려진 레퍼토리를 새삼 반복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만큼 오래 전부터 이미 유명했고, 언제든 각각 찾아오더라도 관객의 기대를 부풀리는 연주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 사람이 한 무대에 서니 골든 듀오. 그런데 공연 홍보 문구에서는 여기에 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또 붙었다. 유명한 연주자 두 사람이 한 무대에 서는 공연은 많지만, 이들의 공연은 더 특별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는
30년 이상 된 특별한 친구 사이다. 이들은 1975년 프랑스의 한 페스티벌에서 처음 마주쳤고, 1년 후 다시 만나 함께 연주했다. 아르헤리치는 마이스키 이전에는 첼리스트와 함께 연주한 적이 없었다. 마이스키는 한 인터뷰에서 첫 듀오 연주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바로 친구가 됐어요. 집에서 잠깐 함께 연주해 보았죠.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어요.”  


친구가 된 듀오의 첫 공식 콘서트는
1978 4월 베를린에서 열렸다. 브람스와 드뷔시, 쇼팽의 소나타를 함께 연주했다. 1980년에는 프랑크와 드뷔시 소나타로 첫 듀오 음반(DG)을 녹음했다. 이후 이들은 전세계 주요 콘서트홀과 페스티벌에서 함께 연주했고, 수많은 명반들을 함께 만들어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데카), 바흐 첼로 소나타(DG) 등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의 듀오 연주를 듣다 보면 이 두 사람의 특별한 교감을 실감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은발의 노년까지
,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한 음반 표지사진들을 쭉 훑어보면, 마음 맞는 친구가 함께 보내온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함께 나이 먹어온 두 친구의 모습이 아름답고, 살짝 부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꼭 음악가가 아니더라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 두 사람이 얼마나 각별한 사이였으면
, 2011년에는 아르헤리치의 70세 생일을 맞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My dearest Martha’라는 타이틀의 음반이 나오기까지 했다.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가 함께 한 연주뿐 아니라 아르헤리치의 독주와 실내악, 협주곡 연주 중에 마이스키가 고른 곡들을 CD 2장에 나눠 실었다.  사랑하는 마르타에게마이스키가 선사한 특별한 생일 선물인 셈이다. 두 사람의 오랜 친분이 빚어낸 색다른 컴필레이션 앨범이 되었다. 

이 두 사람에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까지 더한 앙상블은 클래식 음악사에서도 손꼽힐 만한
드림 팀이다. 이들이 함께 녹음한 차
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3중주 음반(DG), 여기에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까지 더한 브람스 피아노 4중주 음반(DG) 역시 명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도이치 그라모폰은 CD 13장으로 구성된 아르헤리치-크레머-마이스키 2중주 전집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친분을 자랑하는
진정한 골든 듀오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는 지금껏 한국 무대에선 함께 연주한 적이 없었다. 아르헤리치는 기돈 크레머와는 한국에서도 듀오 연주를 한 적이 있다. 1994년 그녀의 첫 내한공연 파트너가 바로 기돈 크레머였던 것이다. 미샤 마이스키가 1988년 첫 내한 이후 수십 차례 한국을 찾았던 것을 생각하면, 왜 지금까지 아르헤리치와 듀오 연주가 한국에서 성사되지 못했을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진정한 골든 듀오의 첫 한국 공연은 벳부 아르헤리치 페스티벌의 서울 공연으로 열린다. 올해로 15주년을 맞는 벳부 아르헤리치 페스티벌은 아르헤리치가 친분이 깊었던 일본의 피아니스트 이토 쿄코와 함께 1998년에 창설한 축제다. ‘음악이 주는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게 아르헤리치가 밝힌 페스티벌 개최의 취지였다

그러고 보니 아르헤리치가 첫 내한 이후 무려
13년 만인 2007년에 섰던 두 번째 내한 무대 역시 이 벳부 페스티벌의 서울 스페셜 콘서트 형식으로 열린 것이었다. 벳부 페스티벌 프로듀서 이토 쿄코, 바이올리니스트 김의명, 이성주, 비올리스트 요시코 가와모토, 첼리스트 정명화가 아르헤리치의 친구들로 함께 연주한 무대였다

아르헤리치는 공연 취소가 잦은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벳부 페스티벌 공연은 지난
15년간 한 번도 취소한 적이 없다. 아르헤리치는 벳부 페스티벌 성공 이후 자신의 모국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스위스 루가노에서도 페스티벌을 열고 있는데, 그만큼 벳부 페스티벌은 아르헤리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녀가 아끼는 페스티벌의 15주년을 맞아 열리는 서울 공연의 파트너로 특별한 친구 미샤 마이스키가 함께 공연하는 것은 그래서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은 두 사람이 즐겨 연주하던 레퍼토리 가운데 엄선한 곡들로 구성했다
. 첫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이탈리아 모음곡이다.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가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를 위해 쓴 발레곡 풀치넬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풀치넬라는 유럽에서 번성했던 이탈리아의 극 양식 코메디아 델라르떼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이다. 스트라빈스키는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지의 악보를 보고 영감을 받아 풀치넬라를 작곡했다. 

스트라빈스키는 강렬한 리듬과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대규모 관현악
봄의 제전으로 충격을 일으킨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고전의 정연한 형식과 아름다운 선율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성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풀치넬라는 원곡에 포함됐던 성악을 빼고 오케스트라, 피아노와 바이올린,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모음곡으로 다시 만들어져 이탈리아 모음곡으로 불리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의 실연으로 들을 수 있게 돼 가슴이 설렌다
. ‘아르페지오네는 많이 알려졌다시피, 슈베르트 당대에 연주되다 사라진, 기타와 첼로를 닮은 악기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주로 첼로로 이 곡을 연주하는데,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레코딩은 앞서 이야기했듯, 손꼽히는 명반이다. 두 사람의 정감 넘치는 대화를 듣는 듯하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에 대한 기대도 크다. 베토벤이 쓴 다섯 편의 첼로 소나타는  이전에 주목 받지 못했던 첼로라는 악기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걸작으로 꼽힌다. 사색적이면서 서정적인 첼로의 매력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가 함께 한 레코딩(DG)은 베토벤 첼로 소나타 연주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음반이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생동하는 연주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 중 2번을 연주한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은 쇼팽의
서주와 화려한 폴로네이즈. 피아노곡을 주로 작곡한 쇼팽은 피아노 외의 악기 중에서는 첼로를 특히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몇 안 되는 쇼팽의 실내악곡들은 대부분 첼로와 피아노를 위해 쓰였다. 이 곡은 제목대로 첼로의 서정적인 선율이 인상적인 서주에 이어 명쾌하고 발랄한 폴로네이즈가 대비를 이루며 화려하게 펼쳐진다

앞서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의 듀오 연주를 무대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이런 표현들을 썼다. 

 

한 마디로 놀라운 공연. 두 사람은 각각의 생각과 테크닉을 어떻게 궁극으로 표현하는지 증명했다. 그들은 서로 장난치고, 밀고, 당기고, 음악을 갖고 놀고, 실험적인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그라모폰>

 

두 사람 모두에게서 열기가 발산됐다. 아르헤리치는 마치 감전된 것처럼 열기를 만들어냈다. 이는 우아한 격정을 발산하는 완전 연소 에너지였다.….. 마이스키는 화염방사기 같았다. ” <뉴욕 타임즈


감전
, 완전 연소 에너지, 화염방사기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공연 리뷰라니. 하지만 이 두 사람이라서 그리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사실 백 마디 말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저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가 함께 선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한데 말이다. 5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한국 무대에 처음 함께 서는  멋진 두 친구가 들려줄 골든 뮤직의 진수를 기대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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