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고선웅 연출 국립극단 제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나에게 여러 모로 특별한 연극이다. 사드 갈등이 고조됐을 때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관객들과 함께 공연을 봤고, 중국인들의 찬사를 들었다. 2020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공연이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된 상황에서, 마치 공연처럼 진행된 프레스 리허설을 보면서 울컥했다. 이형훈 배우로부터 초연 당시 임홍식 배우가 끝까지 무대를 지키다 세상을 떠난 사연을 듣고 또다시 울컥했다. 무대의 무게, 삶의 무게를 깨닫게 해준 이 연극. The Show Must Go On! 다음은 2020년 6월 네이버 중국판 차이나랩에 기고했던 글이다. 

----------------------------------------

조씨고아(氏孤)는 중국 원나라 때 작가 기군상이 춘추시대 진나라를 무대로 쓴 이야기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몰살당한 조씨 집안의 고아가 장성해 집안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이다. ‘조씨고아 이야기는 오랫동안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사랑받으며, 중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중국영화 '조씨고아' (영문제목은 Sacrifice. 한국에서는 '천하영웅' 제목으로 소개됐음) 


 
영화로는 패왕별희의 천카이거 감독이 2010년에 만든 작품이 유명하다. 영문 제목은 ‘Sacrifice(희생)’. 이 영화가, 몰살당한 집안에 갓 태어난 아기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궐장군 역의 황샤오밍, 조씨고아 모친 역의 판빙빙 등 스타 배우들이 모두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조씨고아안(
氏孤)’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 중국 CCTV에서 방영된 드라마도 유명하다. 영화 시절인연드라마 사마의로 친숙한 배우 우슈보가 조씨고아의 주요 인물인 시골의사 정영 역을 맡았다. 조씨집안의 식객이었던 정영은 조씨고아의 모친이 맡긴 갓난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대신 희생시키는 아픔까지 겪으면서, 조씨고아의 복수극을 완성하게 하는 핵심 인물이다. 45부작으로 편성된 드라마는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고, 각종 상을 휩쓸었다.  

 
중국 원대에 유행했던 공연 양식인 잡극으로 쓰여졌던 조씨고아는 공연계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 경극, 곤극, 평극, 월극, 천극 등 중국 각 지방의 전통극 양식뿐 아니라 무용 가극 등 다양한 장르로 탄생하고 있다. 중국 밖에서도 18세기 프랑스에서 볼테르가 각색해 중국고아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공연되었다. ‘동양의 햄릿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연극의 본산인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도 공연되었다. 한국에서는 국립극단이 고선웅 각색 연출로 2015년에 초연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지난해 국립극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햄릿을 제치고 다시 보고 싶은 연극 1에 올랐다. 한국인에게 낯선 중국 고전이 원작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한국 연극계 최고 인기작이 된 것이다. 초연 때 참여했던 배우들이 지금도 거의 그대로 출연하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범상치 않은 사연을 겪으며 무르익어온 공연이다.

 
2015년 초연 당시, 공손저구 역으로 출연하고 있던 임홍식 배우가 공연 폐막을 사흘 남겨놓았던 날, 자신의 출연 분량을 모두 연기하고 무대에서 퇴장하자마자 쓰러졌다. 그는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며 의식을 잃었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고인은 자신이 맡은 역을 마치기 위해 죽음을 앞두고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다. 원 캐스트로 진행하던 배역이라 남은 공연은 취소할 것을 검토했지만, 배우들은 무대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다한 고인의 뜻을 기려 공연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기로 했다. 고인이 맡았던 역은 조순 역의 유순웅 배우가 소화했다.

 
조씨고아공연팀은 이후 공연을 올릴 때마다 고 임홍식 배우를 기리는 시간을 꼭 갖는다.  온갖 악조건 속에 진행된 중국 공연 때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가을, 이 연극은 사드 갈등으로 한중 문화교류에 비상등이 켜진 상황에서, 중국 국가화극원에서 공연되었다. 막이 오를 때까지 난관은 첩첩산중이었다. 나는 마침 중국에서 연수 중이었던 시기라, 이 공연이 올라가는 과정을 지켜볼 기회를 얻었다.

 
중국 세관은 몇 주 전에 화물로 보낸 무대세트를 좀처럼 통관시켜 주지 않았다. 공연 임박해서도 중국 국가화극원 공연장 주변에서 공연 홍보물 하나 찾아보기 어려웠고, 예매 사이트에서는 티켓 판매가 중지된 상태였다. 중국 국가화극원 담당자들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팀은 극장에서 못 하면 길바닥에서라도, 무대 장치가 없으면 빈 무대에서라도, 무대 의상이 없으면 중국 극장 창고를 뒤져 비슷한 옷을 찾아 입고서라도, 어떻게든 공연을 하겠다는 각오로 충만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대장치는 개막 직전에 도착해 급히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시작했다. 변변한 홍보도 없었지만, 첫 공연 이후 중국 공연계에 입소문이 퍼져 마지막 공연은 거의 만석으로 진행되었다. 중국 관객들은 한국 국립극단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 열광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배우들은 중국 공연에 함께 하지 못한 고 임홍식 배우를 그리워하며, 경건한 묵념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초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악조건 속에서 진행된 중국 공연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도 울컥했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중국 공연계에서는 이 공연을 두고 찬사가 이어졌다. 공연장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상하이 희극학원 연출 지도교수인 푸샤오핑(付小萍)교수는, 조씨고아를 살려내고 장성할 때까지 키운 시골 의사 정영을, 영웅적 면모보다 고뇌하는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 설득력 있었다며 극찬했다. 또 정영의 처가 죽은 아이를 묻는 내용은 한국판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며,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푸 교수는 이후 조씨고아 현당대연출(
氏孤 现当代演出)’을 제목으로 낸 평론집에서, 전세계에서 수많은 단체들이 공연한 조씨고아중에 한국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비중 있게 포함시켰다. 그는 지난해 한국 방문길에 나와 함께 국립극단을 찾기도 했다. 

'조씨고아' 비평집을 쓴 푸샤오핑 교수와 국립극단 방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특별한 사연은 이어진다. 이 연극은 올해 70주년을 맞은 국립극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명동예술극장에서 625일부터 726일까지 공연될 예정이었다. 예매 첫날 모든 표가 동날 정도로 기대를 모았지만, 615일 국립 공연장의 무기한 휴관이 결정되면서 개막이 취소되었다. 코로나19의 파고를 피해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단 하루라도 공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지금도 계속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조씨고아역을 맡은 이형훈 배우는, 배우에게는 무대가 곧 삶의 현장이라 했다. 그는 고 임홍식 배우가 무대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 의식을 남겨주고 떠났다며, 끝까지 무대에 대한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초연 때 함께 무대에 섰던 배우를 떠나 보낸 아픔 속에서도
, 중국 공연 때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공연에 임했던 것도 모두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The Show Must Go On!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새삼 일깨워주는 무대의 진실, 삶의 진실이다.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