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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SBS의 인기 드라마 피노키오에는 방송 기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방송국 보도국을 무대로 한 이 드라마는 기자들의 일상을 실제 현실에 가깝게 묘사해 호평을 받았다. 작가는 SBS 보도국 편집회의를 여러 차례 참관하고, 현직기자에게 지속적인 자문을 받으면서 꼼꼼하게 취재해 집필했다 한다.

이 드라마 중반에는 박신혜가 연기한 주인공과 뜻을 같이 하며 상부의 부당한 지시에 맞서던 기자들이 갑자기 좌천 인사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좌천 인사란 시경 캡, 즉 사회부 경찰팀장이 문화부로 근무 부서를 옮기는 것이었다. 인사 발령 공고를 보고 시경 캡은 울분과 실망을 삼킨다. 나는 늦게 귀가해 저녁밥을 먹으면서 드라마를 보다가, 이 장면에서부터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문화부일까. 시경 캡이 갑자기 다른 부서로 발령 나는 건 비정상적인 인사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렇게 좌천된 부서가 다른 부서가 아니라 문화부인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남들은 무심히 지나칠 장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자격지심이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사실 방송 뉴스에 기사가 나가는 빈도로 따지자면 문화부는 사회부에 비해 처지는 부서임에 틀림없다. 문화부 기사는 프라임타임 뉴스에 하루 한두 개 나가면 잘 나가는 편이다. 나가도 뉴스 맨 끝에 배치될 때가 많다. 몇몇 문화부 기자들끼리는 이를 거꾸로 톱, '백 톱'이라 부른다. 그런데 뉴스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다 보니 맨 뒤에 있다가 시간이 넘치면 빠지기 일쑤다. 며칠 이렇게 밀리다 보면 열심히 취재해 써놨던 기사가 영영 나가지 못하고 사장되기도 한다. 스트레이트 기사보다 시급성이 떨어지는 건 알지만, 이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면 기운이 빠진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문화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기 일쑤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문화는 무슨 문화?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요즘 이런 얘기들을 곳곳에서 듣는다. 가끔은 문화예술 종사자들에 대한 반감도 목격한다. 특히 순수예술 분야는 나와는 상관 없고 소수만 즐기는 한가로운 취미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공예산으로 예술단체를 지원하는 데 거부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먹고 사는 일, 중요하다. 맞다. 생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생존을 위해선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몸이 밥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영혼에도 밥이 필요하다. 나는 문화예술이 우리 영혼이 먹는 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영혼에도 밥을 챙겨줘야 한다.  

영국에서는 2차 대전 당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예술가들을 고용해 순회 공연과 전시를 진행하는 조직(CEMA:Council for the Encouragement of Music and the Arts)가 만들어졌다. 전쟁 중에도 영혼에 밥을 주는 일을 국가가 챙긴 것이다. 그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1942CEMA 위원장을 맡았고 그는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상시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이후 이 조직은 전세계 공공 예술 지원의 모델이 된 영국 예술위원회(Arts Council)로 발전했다.   

영혼의 밥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누구나 영혼의 밥을 먹을 수 있고, 먹어야 한다. 그런데 문화예술 분야는 번 돈이 쓴 돈보다 적은 경우가 많다. 수지를 맞추려면 밥값이 올라갈 수 밖에 없는데, 밥값이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골고루 먹을 수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이렇게 지원받은 예술가들은 밥을 더 잘 짓는 한편, 이 밥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책무다.

그러고 보면 문화예술 종사자들은 영혼의 밥을 짓고 차려내는 사람들이다. 문화부 기자는 어느 식당 밥이 맛있는지, 재료는 좋은 것을 쓰는지, 밥을 더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밥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없는지, 더 다양한 메뉴는 나올 수 없는지, 맛있는 밥을 더 많은 사람들이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챙기는 사람이다.   

문화부가 좌천 부서라고?”에서 시작했다가 영혼의 밥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무래도 밥을 먹고 있던 참이라 그랬던 게 아닐까. 어쨌든 그 이후로 나는 (지금은 비록 문화부를 떠나 있지만) 문화부 기자의 자격지심 같은 건 잊고서 다시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었다. 누가 뭐라 하든 문화부 기자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영혼의 밥을 잘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니까.  

*클럽발코니 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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