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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몸이 나이를 안다. 요즘 들어 몸 여기저기 탈이 난다. 이가 갑자기 시려서 치과에 갔더니 무슨 영문인지 멀쩡하던 이에 금이 갔단다. 건강검진 결과표에 곁들여지는 의사의 코멘트가 매년 길어지더니, 올해는 급기야 재검진을 하러 오란다.

다행스럽게도 특별한 병이 있는 건 아니라는데 마음이 좀 씁쓸해진다.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영양제니 비타민이니, 몇 통을 사왔다. 몇 년 묵은 중고차처럼 내 몸도 이제부터는 끊임없이 ‘보수’해 가면서 써야 하는 때에 이르렀나 보다. ‘카카오톡’의 내 프로필에 한동안 ‘유지보수의 기간’, 그리고 ‘건강이 최고’라고 써놓았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최고의 찬사로 여기는 것 역시 내가 나이 들어간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럼 나이 드는 게 싫기만 한 일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가끔은 ‘나이 들어서 좋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얼마 전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의 개관 기념작 ‘3월의 눈’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백성희장민호 극장은 배우의 이름을 딴 국내 최초의 극장이다. 1940년대 연기를 시작한 두 배우는 1950년 국립극단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극단을 지켜온, 우리 연극계의 기둥 같은 존재다. 이 두 배우는 자신들에게 헌정된 이 극장 개관 기념작 ‘3월의 눈’에 직접 출연했다.

 

 장민호 선생은 87세. 백성희 선생은 86세. 지금까지 3, 400편의 연극에 출연했고 ‘살아있는 연극의 전설’, ‘연기의 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이 ‘3월의 눈’에서 노부부를 연기했다. 평생 무대에서 호흡은 맞춰온 사이이니 진짜 부부보다 더 자연스럽다. 이 노부부가 사는 낡은 한옥집은 곧 헐릴 신세다. 한옥이 헐리는 것처럼 지난 세대도, 이들의 삶의 이야기도 사라져간다.  

연극은 느릿느릿 흘러간다. 큰 사건도 없고, 화려한 치장도 없다. 대사 없는 침묵의 시간, 여백이 많다. 꽃처럼 흩날렸다가 곧 스러지는 ‘3월의 눈’처럼 아련하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백성희 선생 말대로 ‘연극이 나인지, 내가 연극인지 모르는’ 경지다. 나는 이 두 사람의 느릿한 몸짓 하나 표정 하나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공연을 보고 ‘3월의 눈’을 쓴 배삼식 작가를 만났다. 그는 이 두 배우에게 영감을 받아 1주일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한다. 60년 이상을 연극에 바쳐온 이 두 배우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시간의 겹’이 없었더라면 이 작품을 쓸 수 없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혼자 쓴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도움으로 쓰여진 것’이라 했다.

이 두 배우는 아름다웠다. 꽃다운 청춘에는 파릇하고 팽팽한 아름다움이 있지만, 세월의 풍상이 새겨진 이들의 주름진 얼굴도 그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내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시간을 연기에 바쳐온 이들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아름다웠다. 나는 인간의 삶을 지그시 응시하는 이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90을 바라보는 ‘현역’ 배우들 앞에서 나는 저절로 경건해졌다.  

공연장을 나서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지금보다 10년, 20년 젊었을 때 이 작품을 봤더라면 과연 지금 같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몰랐던 젊은 날에 이 작품을 봤더라면, 주름진 얼굴이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을까. 혹시나 고요한 정적과 여백을 지겨워하지는 않았을까. 드라마틱한 사건 하나 없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연극의 속도를 답답해 하지는 않았을까.

대학로에서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를 볼 때도 그랬다. 한 평범한 남자의 일생을 풀어내면서 부부애, 가족애를 이야기하는 이 연극 역시 심심할 정도로 잔잔하게 흘러간다. 아직 20대인 회사 후배는 연극을 같이 보고 나서 별 재미 없다며 ‘쿨하게’ 어깨를 으쓱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진부하고 뻔한 줄거리인데도, 무심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언제나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신혼일 수만은 없는 부부 관계, 때로는 남보다 더욱 대화가 힘든 가족 관계, 딸을 시집 보내고 허전해 하는 부모의 심정이 그려질 때, 나는 마치 내 이야기인 듯하여 마음이 갔다. 내 딸은 아직 어리지만, 앞으로 딸이 결혼한다고 할 때 내가 어떤 심정이 될지 저절로 상상이 돼 같이 마음이 허전해졌다.   


현빈의 열성 팬은 아니지만, 영화 ‘만추’를 혼자 보러 갔다(나는 공연이든 영화든 혼자 보는 데 꽤 익숙하다). ‘만추’의 현빈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쿨한 재벌남 이미지를 배반한다. ‘만추’는 행복하고 황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불행한 사람들의 칙칙한 사랑 이야기랄까. 하지만, 인생이 어디 그렇게 행복하고 황홀하기만 한 것인가. 상처 입은 두 사람이 서로의 영혼을 보듬는 찰나는 어두운 절망 속에서 더욱 빛난다. 내 가슴 한 구석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여운이 길어 영화가 끝나고도 자리에서 금방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 옆자리 20대로 보이는 관람객들이 일어나면서 “이게 뭐야?”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만났다는 거야 뭐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대한 것보다 재미가 없다며 실망한 것 같다. ‘만추’라면, 늦가을, 깊어진 가을이다. 한창 화창한 인생의 봄이나 여름을 만끽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영화가 밋밋하고 지루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4계는 이미 봄, 여름을 지나 가을에 와 있는 셈인가.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 다시 보니 좋아지는 작품들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드는 만큼 공연을 볼 때 내 공감의 폭도, 이해의 폭도 넓어지는 것 같아서 살짝 기분이 좋아진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보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공연이나 영화에서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공연이나 영화를 본 감상은 극히 주관적인 것이니까. 나는 그저, 나 자신을 되돌아 볼 때, 예전의 나였다면 이만큼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배우에게만 ‘시간의 겹’이 새겨지는 게 아니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백성희 장민호 선생이 오랜 세월 쌓아온 예술적 경륜의 깊이와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나 역시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온 세월, 공연을 관람해온 시간이 겹겹이 새겨지면서 조금씩 더 성숙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나이 들어서 좋은 점도 있다. 

 

90을 바라보는 백성희 장민호 선생은 아직 은퇴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연기의 신’으로 불리는 지금도 연극은 엄숙하고 어렵다고 했다. 눈 감을 때까지 무대에 오르는 게 배우의 사명이라 했다. 이들을 보면서 나도 소망이 하나 생겼다. 나도 눈 감을 때까지 무대를 지켜보는 ‘현역’ 관객이 되고 싶다. 나이가 더 들면 지금보다 더 넓고 깊은 눈으로 공연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원로 배우’가 있다면 ‘원로 관객’도 있을 터이다. 몸은 노쇠해 간다 해도, ‘시간의 겹’과 함께 계속 성장하는 관객으로 남고 싶다.  

 

*계간지 ‘클럽 발코니’ 이번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연극 ‘3월의 눈’은 5월 7일부터 앙코르 공연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백성희 선생은 편찮으셔서 출연 못하신다고 하고요. ‘민들레 바람 되어’는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5월 29일까지 공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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