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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서

이자람, 그녀는 예쁘다!

soohyun 2013. 10. 27. 23:28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이자람의 판소리 브레히트 '억척가' 프로그램 북에 실린 졸고. 2년 전 '억척가'를 보고 와서 이 블로그에 썼던 리뷰를 바탕으로 다시 썼다. '추임새를 연습 중'이라고 글에도 쓴 것처럼, 이번 공연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는데, 출장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보지 못해 정말 아쉽고 원통하다. '억척가' 세번째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예쁘다!' 추임새는 그 때 열심히 해야지. 

 

2년 전, 이자람의 판소리 브레히트 <억척가>를 처음 관람했던 날. 마지막 소리의 여운이 사라지자 관객들은 모두 기립했다. 여러 차례 이어진 커튼콜과 뜨거운 환호성. 나는 압도적인 감동에 휩싸여, 공연이 끝나고도 한동안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이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게 고마웠다. 지난해 <억척가>를 두 번째 관람했을 때에도 그랬다.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바탕으로 이자람 씨가 직접 대본 쓰고 작창하고 연기까지 했다. 중국의 삼국지 시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생존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인의 이야기다. 이 여인은 김순종에서 김안나, 김억척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아이 셋을 데리고 달구지에 온갖 물건 싣고 전쟁터를 쫓아다니는 '전쟁상인'으로 살아간다

권력자들은 좀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만, 민초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하나의 전쟁이다. 억척네가 전쟁터를 돌면서 그악스럽게 아귀다툼 하듯 사는 이유는 자식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잡혀간 둘째 아들의 몸값으로 '가족의 밥줄'인 달구지를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망설이고, 창졸간에 죽음을 당한 아들의 시신 앞에서도 '내 아들이 아니'라고 답하는 비정한 어머니가 되는 것도, 모두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억척네는 아이들에게 용기와 정직, 사랑이라는 가치를 가르쳤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자신이 믿었던 가치에 배신을 당하고 더욱 억척스럽게 살기를 다짐하게 된다. 억척네는 극의 막판,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딸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다가 '나는 시체 파먹는 구더기가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자람의 소리와 연기는 종횡무진이다. 1 15, 이자람 안에는 억척스런 어머니도, 용감한 큰 아들도, 우직한 작은 아들도, 착한 막내 딸도, 수작 거는 취사병도, 거드름 떠는 장군도, 애교 떠는 뺑마담과 사이비 천의도사도 다 들어있다. 2시간 40분 내내 관객을 웃기고, 울리고, 들었다, 놨다, 한다.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줄줄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억척네의 삶이 슬퍼서만은 아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너무 뼈저려서인지도 모른다.

이자람의 연기를 보면 천재적인 재능에 감탄하게 되지만, 그녀는 대단히 성실한 노력파로도 소문나 있다. 이 작품은 '이자람이라는 천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술술 쓰고 불러낸 것'이 아니다. 이자람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 테지만, 작품 자체는 이자람 혼자가 아니라 공동작업으로 이뤄졌고, 수많은 리허설을 거쳤다. 

리허설을 취재하러 갔을 때, 이자람은 취사병의 캐릭터가 잘 잡히지 않는다며 고심하고 있었다. 취사병이 핫핫핫, 하고 호탕하게 웃어야 하는가 아닌가. 부채를 접었다 펴는 동작은 왜 필요한가. 표정은, 어조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녀는 대사 하나 동작 하나도 정말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제대로 못 한다고 했다. 그러니 이자람의 걸출한 연기는 연출가 남인우와 수없이 토론하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자람은 이런 작품을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판소리만큼 드라마와 음악이 찰떡궁합으로 맞는 멋진 장르가 없다며, 판소리의 동시대성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판소리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그녀의 '<억척가>를 보다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억척네가 살았던 전쟁터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국립국악관현악단 원일 예술감독이 이자람은 보물이요, <억척가>판소리 현대화 작업의 최고 성취라고 극찬한 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통 판소리는 한자어가 많고 생소한 중국 지명과 고사가 많이 등장해서 대본 없이는 이해가 힘들 때가 많다이자람의 '이야기'는 어렵고 현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쉬운 일상어로 전해진다. <억척가>의 대사는 귀에 착착 들어온다. 판소리가 지닌 세태 풍자의 힘과 해학성은 그대로 살아있다. 김순종이 바람 부는 날 그네 타러 갔다가 치마가 훌러덩~해서 삽시간에 '마릴린 순종'으로 소문이 났다'는 대목, 김순종이 안나로 개명할 때, 글로벌 시대이니 영어 이름을 지어보자......아이는 안 낳을 테니 안 낳아 안 낳아 안나 안나, 내 이름은 안나' 하는 대목 등등 발랄한 대사가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음악적으로는 창자와 고수라는 판소리의 기본적인 틀은 유지하면서도 다양성을 더했다. 북 외에도 베이스를 비롯해 다양한 악기가 음악을 연주한다. 전통 판소리의 가락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들린다. 단순히 '반주'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이자람의 소리와 주거니 받거니 어우러지면서 극을 이끌어간다. 이자람은 '만약 전통 판소리 하던 시대에도 이런 악기들이 널리 연주되고 있었다면 당시 소리꾼들도 이런 악기들을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요'라고 했다

나는 이자람이 1999 <춘향가>를 최연소로 완창할 때 취재한 적이 있다. 예전에 '내 이름 예솔이'로 유명했던 그 꼬마는 명민한 국악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도 10여 년이 흘러 다시 만난 이자람은 생각이 많고, 이야기하고 싶은 게 뚜렷한, 정말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리더이기도 하고, 뮤지컬 <서편제>에 출연한 뮤지컬 배우이기도 하다. 이자람의 다양한 활동은 다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지만, 중심에는 자신이 '소리꾼'이며 '이야기꾼'이라는 자각이 있다

그녀의 판소리 브레히트 첫 번째 작품인 <사천가> 역시 꾸준히 공연되며 주목 받고 있다. <사천가> <억척가>는 해외 공연장에서도 환영 받는 작품이다. 이자람은 해외에서도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에 마치 '빙의'를 한 듯 연기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한다. 지난해 <억척가> 국내 공연에서 나는 외국인 관객들을 여럿 목격했다. 대사 자막은 없었지만 이자람의 연기와 소리는 이들에게도 희로애락과 수많은 감정을 전달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자람의 소리는 만국공통어. (이번 공연은 영어 대사 자막을 제공한다.)

이자람은 <억척가> 도입부에서 "모순 가득한 이 세상,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 이렇게 판소리 한 자락 들을 수는 있으니, 그 아니 좋을쏘냐!"라고 했다. 맞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모순이 가득하지만, 이렇게 이자람 판소리 한 자락 들을 수 있으니 그 아니 행복할쏘냐! 나는 이자람의 <억척가> 세 번째 관람을 앞두고 추임새를 연습 중이다. ‘좋다’ ‘잘한다도 좋지만, ‘예쁘다라는 추임새를 가장 좋아한다는 이자람. 그녀는 정말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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